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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밤 Sep 22. 2020

내 집 마련 분투기

2017년 5월. 남편은 꿈에 그려오던 이직에 성공했다. 여러 가지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지만, 계속해서 건설회사에 근무할 경우 해외 발령을 피할 수 없다는 것, 그 곳이 가족과 함께 가기 힘든 곳일 수 있다는 두려움이 가장 컸다고 했다.


연애 시절, 신입사원 교육이 끝난 뒤 마흔 다섯 명의 토목직 동기들 중 유일하게 서울 현장에 배치를 받은 것도 남편이었다. 워낙 의뭉스런 사람이라 그땐 잘 몰랐다. 일이 힘든 현장으로 정평이 나서 누구도 나서서 지원하지 않았던 지하철 현장에, 지하철 맨이 되고 싶습니다! 라고 번쩍 손을 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이유가 크게 의리 없어 보이는 여자친구 때문이었다는 것을.

덕분에 갖은 고생을 하며 서울지하철 현장에서 이 년 반을 버티던 남편은, 고라니가 뛰어다니고 요강만한 크기의 금슬 좋은 두꺼비 부부가 현장사무실 앞을 지키고 있다는, 밤이면 뒷산의 아기 무덤에서 울음 소리가 메아리친다던 부산 택지 현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의리 없어 보였던 여자친구는 의외로 롱디 생활에 적합한 인재였으며, 서울에서, 부산에서 각자 직장생활을 이어가던 우리는 어느덧 결혼을 약속했다.


주말 부부로 살아갈 것을 예정하고 시작했던 우리의 신혼. 신혼여행에서 복귀하고 맞은 첫 주말 일요일 저녁, 집을 나서야 할 시간을 훌쩍 넘기고도 아쉬움에 오 분, 십 분을 미루다 기차를 놓칠 뻔 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 주 어느 출근길 아침, 전화가 걸려왔다. 흥분된 목소리. 갑작스럽지만 바로 다음 주부터, 본사로 출근하게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지방 발령 10개월 만에, 이번에도 남편은 오뚝이처럼 일어나 내 곁으로 돌아왔다.

현장 생활 중 한 달 가량 그룹 업무에 차출된 적이 있었던 남편을 좋게 봐 주신 상사님과, 신혼인 남편을 불쌍히 여기시어 인력 요청에 흔쾌히 오케이를 해 주신 부산 소장님의 하해와 같은 배려 덕분에,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동거인이 될 수 있었다. 새벽 출근과 아침 체조 대신 인간다운 여덟시 출근으로, 매일같이 입던 후줄근한 청바지 대신 반듯하게 다린 셔츠를 입고, 초가지붕같던 머리 대신 왁스를 발라 올린 머리의 남편은 꽤나 근사했다. 이 시절에 얽힌 에피소드도 있다. 남편과 한 엘리베이터에 타신 모 차장님께서 오랜만에 남편을 보고 하셨다는 말씀이다. "김대리, 혹시, 성형했나?"


비록 논란의 성형설은 사실이 아니었지만, 인사 담당자로의 커리어 전환만은 남편 인생의 성공적인 리모델링인 것이 확실했다. 여전히 대기업의 노예였고, 주말도 없이 불려다니며 격무에 시달리는 인생이긴 했어도, 거대 기업에서 겪어낸 4년간의 인사 경력이 경영도 경제도 아닌 토목을 전공한 남편을 인사 전문가로 세탁해 주었으니 말이다.


2017년의 봄, 남편은 황금 연휴에도 하루도 편히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나란히 자리에 누워 주원이를 재우다 나도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새벽에 깨어 찾은 남편은 불 켜진 방에서 자소서를 다듬거나 구인 사이트를 뒤지고 있었다. 다행히 가까스로 서류를 통과한 세 개의 회사에 며칠 간격으로 면접을 보았고, 그 중 우리가 가장 원했던, 하지만 될 턱 없어 보였던, 심지어 면접을 가장 망친 것 같다던 회사에 합격했다. 느낌이 좋다며 확신했던 회사에는 보기 좋게 떨어졌지만 말이다. 가족과 함께 살며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싶다던 남편의 오랜 바람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어렵게 옮긴 남편의 새 직장은 경기도 우리 집에서 경부 고속도로를 지나, 고스란히 서울 한복판을 통과해야만 갈 수 있는 곳에 위치했다. 금요일 저녁의 시내 도로는 퇴근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 교통 체증이 극심했다. 편도 두 시간 삼십 분. 남산 1호 터널 안 광역 버스에 한 시간을 갇혀 있다 집에 돌아온 남편은 폐소 공포증이 생길 것 같다며 엄살을 부렸다. 전세 기간도 일 년이나 남았고, 주원이가 다니게 될 유치원과 초등학교까지 점찍어 둔 데다, 일 년 간 동네에 적응하기 위해 부단히 애쓴 내 시간이 아까웠지만, 우리집 가장을 폐소공포증에 시달리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간 모은 종잣돈에 남편의 피,땀,눈물이 담긴 퇴직금을 더해, 우리는 그 해 여름을 부동산 투어에 오롯이 바쳤다.


회사에서 너무 멀지 않으면서, 살고 싶은, 살(buy!) 수 있는 집을 고르는 것. 분명하지 못한 성격의 우리 둘에게는 너무나 어려운 선택이었다. 전문 용어로는 임장(臨場)이라 부른다는 남의 집 기웃거리기. 주말이면 이른 아침부터 집을 나서 유람을 하고 밤 늦게야 돌아오곤 했는데, 다행히 단지마다 놀이터가 있어 놀이터 도장깨기라도 하듯 어린 아이를 데리고 열심히 떠돌아 다녔다. 점심은 주로 김밥을 사서 차에서 먹었다.

유난히도 덥고 이글대던 2017년의 여름. 여전히 서울 집값은 지금의 절반 밖에 안 되던 무렵이었다. 물론 그 절반의 돈조차도 손에 쥐고 있지 못했지만, 집을 담보로 융자를 조금 받으면 될 것 같았다.

뙤약볕 아래 땀을 뻘뻘 흘리며 돌아다니면서도 우리는, 이 넓은 서울, 이 수많은 집들 가운데 드디어 내 집을 마련할 수 있다는 꿈에 한껏 부풀어 있었다. (1/2)




그리고 우연히 누군가는 행복한 집에 산다. 누군가에게는 충분한 돈이 있다. 누군가에게는 차마 버리기 어려운 꿈이 있다. 누군가는 집에서 누리는 하찮은 기쁨으로 충만해진다. 그리고 우연히 당신에게는 어떤 집이 있다. <집은 그럴 수 있다>, 김상혁.


2017년 여름, 우리는 정착할 수 있는 '우리집'을 찾아 온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던 중이었다. 일련의 사건들로ㅡ다소 소란스럽게ㅡ정권이 바뀐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고, 금리는 계속해서 내려가고 있었고, 그간 잠잠하던 부동산 시장도 꿈틀대기 시작하고 있었다.


빠듯한 예산으로 집을 구해야 했던 우리는 몇 년 사이 훌쩍 올라 있는 집값에 절망했다. 여전히 우리가 결혼했을 무렵, 가장 침체되어 있었던 주택시장을 기준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와 돌아보면 그 거품 같던 가격조차 당분간 다시 돌아오지 않을 부동산 시장의 저점이었지만 말이다. 부모님을 비롯해 주위에서도 오를 대로 오른 집값이 이제 떨어질 일만 남았다고, 조금만 더 기다려 보라는 조언 뿐이었다.


그 해 8월, 정부에서는 투기를 잡고 집값을 안정시키겠다는 대대적인 발표와 함께 분양권의 전매 제한, 다주택자의 양도세 가산이라는 강력한 카드들을 내놓았다. 이제 부동산 시장은 끝이 났다는 신문사들의 전망과 부동산 카페에 올라오는 곡소리 나는 글들을 읽으며 우리 부부도 마지막이 될 2년만 더 전세를 살자고. 그 사이 집값이 내릴 것이고, 우리도 더 열심히 돈을 모으면 되겠다는 순진하고도 희망적인 결론을 내렸다.

무사히 퇴직금을 받으면 내게 사 주기로 약속한 중고차ㅡ네이비색 QM3를 타고 싶었다ㅡ도, 5부 다이아에 심플한 줄이 연결된 우아한 목걸이도, 모두 2년 뒤 내 집에서 고민하기로 너그러이 미뤄 주었다. 외제차가 더 많은 부자 동네에서 나는 씩씩하게 결혼 전부터 함께한 남편의 쥐색 구형 소렌토를 몰고 다녔고, 내 집을 장만할 생각을 하면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언제 집을 계약할 지 모르니 가능한 계약금을 통장에 많이 가지고 있어야 할 것 같았고, 남편의 회사에서도 가까운 거리에 있고, 남편의 고향이기도 한 고양시의 신흥 택지지구 '삼송'은 그런 우리의 사정에 꼭 맞았다.

여름의 한 가운데, 푸르른 동네 풍경도 마음에 들었고 이미 한적한 외곽 생활에 적응해 온 터라 조금 심심해 보이는 주변도 괜찮을 것 같았다. 보러 들어가는 집마다 친절했던 사람들, 놀이터에 가득한 어린 아이들, 입주한 지 몇 년 되지 않은 깨끗한 새 집.

멀리 북한산이 시원하게 바라다보이는 고층과, 넓은 잔디밭이 가까이 내려다보이는 삼 층을 두고 고민하던 우리는 내가 좋아하는 저층 집을 택해 네 번째 전세 살이를 시작했다.


'집 값 안정'을 위한 크고 작은 대책들은 그 뒤로도 스무 번이 넘게 계속되었고, 그때마다 서울의 집값은 '안정'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호쾌하게 비웃듯 더 높이, 더 멀리 규제 밖으로 달아났다. 2년을 기약하며 시작한 우리의 전세 살이도, 내 집 마련의 꿈도 함께 기약없이 멀어져 갔다. '저소득' 의 신혼부부라는 애매한 기준에도, '다둥이' 가족이라는 높은 벽에도 가로막힌 우리는 백 번은 족히 넘을 듯한 청약 도전에서도 연신 쓴 맛을 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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