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름밤 Sep 19. 2020

피아노에 대한 오해

벌칙이 아니었는데.

90년대를 살았던 대부분의 어린이들이 그러하듯 나도 피아노를 배웠다. 여섯 살 무렵이었을 거다. 처음에는 집에서 엄마와 바이엘을, 악보를 조금 볼 줄 알게 된 다음부터는 피아노 학원에 다녔다. 음악을 전공하고, 실제로도 무척 좋아했던 엄마는 막내딸에게도 음악의 재능이 있으리라는 헛된 기대를 품고 있었다. (전혀 재능이 없음을 선고받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였다.) 덕분에 일찍이 단념한 발레나 리듬체조와는 달리, 피아노만큼은 엄마의 열성에 힘입어 꾸역꾸역 진도를 나갔다.


평일 오후 다섯 시 무렵이면 학교에서 퇴근한 엄마가 돌아오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나는, 여섯 살이 되던 해부터는 더 이상 엄마가 반갑지 않았다. 열 시간 만에 다시 만난 엄마의 첫마디는 항상 같았다. "피아노 연습했니?"

나는 서슬 퍼런 엄마가 무서워 피아노 연습을  날이든, 하지 않고 놀았던 날이든  일단은 했다고 둘러댔다. 나를 돌봐주셨던 이모할머니도  상습적인 거짓말에 매번 맞다고 역성을 들어주셨다. 하지만 귀신같은 엄마는  거짓말에   번도 속아주지 않았다. “그럼 어디  .” 어차피  들통나버릴 거짓말이었다.


엄마가 집에 있는 시간이면 내 자리는 늘 피아노 앞이었다. 이놈의 건반은 두드려야 소리가 나니 안 치는 걸 치고 있다고 할 수도, 다섯 번 칠 것을 네 번만 치고 끝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여섯 살 인생의 첫 번째 스트레스, 피아노였다.


초등학교 이 학년이 되던 해부터는, 삼십 분 정도 걸리는 거리를 걸어 조금 더 유명한 선생님이 계신 피아노 학원에 다녔다. 갈 때는 혼자, 올 때는 당시 막 면허를 딴 엄마의 쥐색, 중고 프라이드를 함께 타고 돌아왔다. 학원이 끝나면 길목에 서서 엄마를 기다렸다. 엄마의 퇴근이 늦어지는 날이나, 엄마의 초보운전이 곤경에 빠지는 날이면 몇십 분을 그 길목에, 꼼짝 않고 서서 기다려야 했다. 이번에도 피아노가 원수였다.


피아노에 대한 가장 서운한 기억은 여름 휴가를 앞두었던 어느 저녁에 벌어졌다. 모처럼 가족들이 다 같이 거실에 모여 과일도 먹고, 티브이도 보며 한껏 들뜬 마음으로 다가올 휴가를 계획하고 있을 때였다. 분명 기분이 좋아 보였던 엄마는 갑자기 얼굴을 굳히며, 나에게 방에 들어가 피아노 연습을 하라는 청천벽력 같은 명령을 내리셨다. 내가 엄마가 되어보니 이제 알겠다. 휴가를 가기 위해 부모는 미리미리 아이의 숙제를 끝내 놓아야 한다는 것을. 그건 엄마에게도 하기 싫은 숙제였다는 것을.

하지만 나는 열 살이었고, 나만 쏙 빼고, 멋진 모험을 떠나기 위해 신나게 작당 모의를 하는 해적들이라도 된 것 같은 가족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방 안에서 혼자 피아노를 치는 그 마음은 정말이지 외롭고 쓸쓸했다. 피아노라는 감옥에 갇혀, 나만 혼자 벌칙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오빠와 함께 시작했던 피아노였다. 오빠도 나만큼이나 피아노에는 적성도, 흥미도 없어 보였다. 초등학생이 된 지 얼마 안 되어, 피아노가 치기 싫다는 투정을 하기 시작하자마자 엄마는 그럼 그만두렴, 하고 오빠의 피아노 학원을 단칼에 끊어 버리셨다.

서러워 미칠 노릇이었다. 나 역시 치기 싫다고 수없이 고해 보아도, 엄마는 끄떡이 없으셨다. 그럼 오빠는? 왜? 아무리 물어도 소용이 없었다. 이쯤 되니 엄마는 나를 작정하고 미워하는 사람이었다. 나를 괴롭히기 위해 피아노라는 회초리를 휘두르는 것만 같았다. 초등학교 일 학년, 뒤늦게 서랍에서 발굴한 아빠의 생신 편지에 일곱 살이었던 나는 그렇게 적었더랬다. '아빠, 생신을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저는 엄마가 정말 싫습니다. 왜냐하면 엄마는 치기 싫은 피아노를 억지로 시키기 때문입니다.' 아빠의 생신을 축하하는 건 핑계, 나를 괴롭히는 엄마를 혼내달라는 호소나 다름없었다.


결국 나를 향한 엄마의 피아노 고문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반 중학교에 진학하며, 비로소 나의 재능 없음이 명백해졌을 때 즈음에야 간신히 막을 내렸다. 이후로는 피아노 뚜껑 위로 뽀얗게 먼지가 내려앉도록, 일 년 내내 피아노에는 손도 대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잠시, 고등학교 음악 실기 시험을 치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한 달간 부활했던 나의 피아노는 다시금 긴 동면에 들어갔고 대학에 들어간 뒤 화장대를 갖고 싶다는 이유로, 내 생일과 같은 연도에 생산되어, 나와 스물 몇 해의 세월을 함께해 온 영창피아노는 단돈 오십만 원에 중고 매매상의 트럭에 실려 내 방을 떠나가고 말았다. 피아노를 뺀 자리에 피아노를 판 돈으로 산 앤티크 화장대를 들여놓으며 그렇게, 십여 년을 별러 왔던 복수에 성공하고 만 것이다.


하지만 운명이란 늘 얄궂은 것이기에. 나는 피아노를 좋아하는, 심지어 피아노를 매우 잘 치는 남자를 만나 결혼을 했다. 남편은 예식장의 식사 자리, 고기를 써느라 그 누구도 음악에 집중할 수 없는 타임을 골라 나를 위한 멋진 재즈곡을 연주해 주었다. 그 한 곡의 완성도를 위해 남편은 지방 근무 중이었던 부산에서 오십만 원을 주고 중고 키보드를 구입했고, 나는 좁은 신혼집의 처치 곤란 아이템이었던 그 키보드를 옷장과 천정 사이 처박아 둔 채 가끔, 아주 가끔 남편이 피아노를 치고 싶어 할 때마다 꺼내어 두도록 허락했다.




일곱 살의 여름, 어쩐 일인지 먼저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는 아이를 데리고 피아노 학원을 등록했다. 피아노 연습과 숙제를 위해, 피아노는 아니지만 아빠의 건반을 꺼내 주었다. 아무래도 터치가 너무 가볍다. 몇 년 전 미련 없이 내다 버린 나의 영창 피아노. 그 낡은 업라이트 피아노가 가까운 할머니 댁에 아직 있었더라면.


몇 주 전, 아이의 숙제를 봐주기 위해 피아노 앞에 앉게 된 나는 오래되고 낡은 소나티네 악보를 펴고 몇 년만의, 더듬거리는 연주를 시작했다. 오래전이지만, 수없이 연습했던 곡이라서인지 멜로디는 익숙했고 몇 번인가만에는 완곡을 할 수 있었다. 형편없는 연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아름다운 음악이었다. 서른 넷의 여름. 나는 뒤늦게 피아노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터치가 부실한 건반에는, 이어폰을 연결해 이른 시간이나 늦은 저녁에도 피아노를 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나는 하나의 곡을 멋지게 연주해내기 위해 밤낮으로 연습을 반복했다.


피아노를 치라고 해야 할 엄마가 피아노에 달려들어 떨어질 줄을 모르자 아이는 어리둥절해했다. 게다가 얼굴은 무척 신이 나고 즐거워 보인다. 피아노를 배우겠다고 해 놓고도 반복적인 연습에는 시큰둥하던 아이가, 갑자기 저도 연습을 해야겠다며 엄마를 밀어낸다. 이제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도 치고, 늦은 밤 졸려움을 무릅쓰고도 친다. 자리를 비우면 엄마가 곧장 등판할 것이기에. 아빠도 대열에 합세했다. 엄마가 한 곡을 연주하면 아빠는 자신이 그 곡을 더 잘 쳐 보겠다며 경쟁을 붙인다. 그렇게 올 여름, 우리 세 식구는 하나뿐인 싸구려 건반 앞 자리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다툼을 벌였다.


이제 알겠다. 피아노는 그 누구에게도 벌칙일 수 없다는 것을. 물론 억지로 권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도레미파솔라시도. 손가락만 있다면 누구라도 한 번에 정확한 소리를 낼 수 있는 악기이기도 하니, 탬버린이나 캐스터네츠가 아니고서야 음악이라는 넓은 바다에 이토록 쉽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방법도 없을 것이다.


피아노에 대해 전부 나쁜 기억만 남아있는 것은 아니다. 여름날이었고, 엄마의 무릎을 베고 누워있었고, 낡은 전축에서는 헨델의 라르고가 피아노 독주로 울려퍼지고 있었다. 평화로운 기운이 우리를 감쌌고, 곧 낮잠에 빠져들었다. 행복했던 기억의 조각이었다.


책꽃이 구석에 방치되어 있던 수많은 LP들, 잔뜩 물건이 올라가 사용할 수조차 없었던 턴 테이블. 모두 대학생 시절의 엄마가 피아노를 가르치고 과외를 하며 하나 하나 사 모은, 소중한 것들이었다. 이제는 안다. 엄마는 그렇게 좋아하던 음악을, 직장생활을 하며 정신없이 우리를 키우는 동안 자리에 앉아 차분히 감상할 시간조차 없었으리라고. 그러면서도 사랑하는 딸에게만은, 당신이 가장 행복해질 수 있었던 그 방법을 알려주고 싶어 그토록 원망을 사면서도 악을 쓰며 버텼던 것이리라고.


나는 내 아들이 베토벤이나 모짜르트, 대한민국의 조성진이 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안다. 그렇게 될 수 있다 한들 그토록 빛나고도 어려운 삶을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내 아이가 피아노를, 또는 다른 어떤 악기를 자유롭게 연주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어떤 음악이, 항상 내 아이의 삶 곁에 머물기를 바란다. 나의 어머니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덕분에 서른 넷의 여름, 나는 오늘도 피아노 앞에 있다.

이전 22화 가을 소확행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