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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밤 Sep 22. 2020

A Library of one’s own

아카시아 원목으로 만들어진 두텁고 묵직한 나무 책장. 두 칸씩 세 셋트, 여섯 줄이나 되는 키 큰 책장을 혼수로 장만해 스물 여섯 평짜리 신혼집에서부터 거실의 한 쪽 벽면에 답답하게 놓고 살았다.

숱한 이사를 다니며, '책장'이라는 항목은 이삿짐센터 아저씨들이 혐오하는, 그 덕에 이사 비용을 훌쩍 높이는 짐이 되기도 했다. 스물 일곱. 고작해야 일 년에 서너 권? 책도 잘 읽지 않던 무렵이었는데 어째서 책장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는지 모르겠다.


처음에는 내가 친정에서 들고 온 책들, 남편이 결혼 전에 읽던 책들(주로 빌 게이츠, 잭 웰치, 워렌 버핏같은 명사들의 자서전 류였다. 그들과 무슨 인연이라도 있는지, '점심 식사'라도 함께 한 것인지, 버리지 않으려는 남편을 겨우 설득해 지난 이사에 내놓았다), 각자의 두꺼운 전공 서적들을 채워 넣은 뒤에도 꽤 많은 칸이 비어 있었다. 비어 있는 공간에 우리는 촌스러운 조화가 담긴 화분이나, 휴지곽, 결혼 서약서, 기린 인형 같은 것들을 진열해 두고 지냈다.


이후 남편의 첫 직장에는 사원들의 독서를 권장하는 제도가 생겨나, 독후감을 적어 내는 조건으로 한 달에 세 권씩, 무료로 책을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공짜라면 사족을 못 쓰는 남편은 역시나, 사내 독서왕이 되었다. 제목만 가지고 상상 속의 소설을 써 내려가기도,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후기들을 요리조리 편집하는 잔꾀를 부리기도 하면서 남편은 꼬박꼬박 세 권씩, 책장의 책을 늘려갔다.

새 책이 있으니 들추어 읽어보게 되기도 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세 권 중에 한 두 권,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청탁하는 일도 생겨났다. 학교를 졸업하며 한동안 뜸했던, 책과의 오랜 우정이 다시 반짝이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우리의 인연은 코흘리개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달리기는 세상 느려도 걸음마와 한글만은 일찍 떼었다는 나. 출근한 엄마도, 초등학생인 오빠도 없는 집에 남은 것이라고는 아무 데도 가지 않는, 늘 그 자리에 있는 책 뿐이었을 테다. Tv에도 발이 달려 있는 건 아니었지만, 유치원에 다녀오고도 화면 조정 시간을 한참 기다려야지만 딩동댕 유치원 재방송을 볼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나는 아마 외로웠던 모양이다. 이미 혼자서도 읽을 수 있는데도, 퇴근한 엄마의 바짓가랑을 붙잡고 이미 내용마저 다 외고 있을 동화들을 읽어달라고 졸랐다는, 나도 기억나지 않는 내 이야기 속의 내 마음은, 아마 보고 싶었던 엄마가 따뜻한 곁을 내어주기 원했던 마음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학교에서 아이들과 씨름하며 내지른 고성과 잔소리에 이미 지친 엄마가, 곧장 옷을 갈아입고,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어질러진 집안을 치우고, 그러면서도 십 년동안 저녁 일곱 시 수영 강습을 빼먹지 않았던 슈퍼 우먼인 엄마가, 막내딸을 곁에 두고 차분히 책을 읽어주길 바란 건 욕심이고 무리였다.


물론. 포기를 모르는 비범한 사람이었기에 엄마는 나의 요청을 완전히 묵살하는 대신 대안을 제시했다. 내가 좋아하는 동화책을 엄마 목소리로 모두 녹음해 두는 것이었다. 반듯한 글씨로 책의 제목을 테이프에 붙여 두는 것도 잊지 않으셨다. 나는 그것들을 늘어질 때까지 반복해서 들었다. 늘 외로운 나에게, 바쁜 엄마가 소개해 준, 책이라는 친구가 생긴 것이다.


누구에게나 그러했듯, 어린 시절의 독서란 말 그대로 재미다. 책을 쥐고 읽어가기 시작하면, 책을 두고 나가야 할 시간이 되어도 손에서 놓지 못할 만큼 빠져드는 것. 독서를 끝내지 못하면 뒷 이야기가 궁금해서 견딜 수 없고, 그렇기에 어떤 책이든 단숨에 해치울 수 있는 것. 아무리 위대한 작가의, 그 어떤 훌륭한 묘사도 따라갈 수 없을 아이만의 무궁한 상상력의 그물을 펼쳐두고, 책 속으로 들어가 모든 것을 생생하게 경험하고 느끼는 것. 뭐랄까. 영화 '주만지'처럼 말이다.


뻔한 전개지만, 둘도 없을 것 같던 우정은 잊혀져 갔다. 친구 없던 아이인 나에게도 현실 친구가 생겼고, 학교가 끝나면 빈 집 대신 친구 집으로 매일 출근하면 되었다. 사춘기가 오자 살아 움직이며 설렘과 떨림을 주는 사람이 나타났고, 나는 그 사람이 책 속에만 있던 완벽한 이상형보다 훨씬 멋지고 소중했다.

어떤 시기에 책은 또 다른 형태로,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내 키만큼 많은 문제집을 쌓아가며 입시를 치르고, 재미 없는 전공 서적을 외워가며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로 진입하기 위해 또 다시 '시험'을 준비하며 배낭 가득 '책'을 메고 다닐 적에는 꼴도 보기 싫었다. 지겨웠다. 합격만 한다면 내다 버릴 생각이었다. 그러면서도 매일 만나야 했기에 정성스럽게 줄을 긋고 예쁜 글씨로 필기를 남기려 애썼지만 말이다. 오랜 우정은 어느덧 애증의 관계로 변질되었다.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누구든지 당연히 거쳐 가는 수순이라고만 쉽게 생각했던 일들이 나에게는 그토록 갈피를 잡지 못할 소용돌이 같았다. 사랑하는 남편과 아이가 있어도 때로는 한없이 외로웠다.

어릴 적 꿈꾸었던 내 모습과 사회의 높은 문턱 사이에서 좌절하며 그 무엇으로도 바닥난 자존감을 채울 수 없었다. 큰 문제 없이 흘러가는 주부의 일상이 허망함으로 다가오는 날도 있었다.

발길 가는 대로, 약속도 없이, 나는 오랜 친구를 다시 찾아갔다. 어느덧 자주 서점에 들러 책을 고르고 읽었다. 마음을 채웠다.


신혼 집보다도 여섯 평이 작은, 전용 44제곱미터 전세집으로의 이사를 앞두고 나는 마치 영영 이민이라도 떠나는 사람처럼 살림살이며, 가재도구들을 끊임없이 팔아치웠다. 냉장고 한 대를 뺀 가전제품 일체를 나누고, 팔고, 창고로 보내 버렸다. 어머님 댁에 방 하나를 신세짐으로써 신혼때부터 사용해 온 침대와 화장대마저 정리했다. 겨울 이불 두 채와 여름 이불 두 채, 자주 입는 옷으로만 사계절 단출하게, 내 집에 입주할 때까지 그간 소중하게 사 모은 살림살이들과 잠시만, 이별하기로 마음먹었다. 덩치 큰 책장과, 그새 책장 여섯 줄을 꽉 채운 책들도 그 이별 목록에 있었다.


'서재를 떠나보내며', 나는 슬픔에 겨워 당분간 들춰보지 못할 책들을 정리했다. 책을 하나 하나 꺼내어 접어둔 페이지를 뒤적이며 이 구절은 2년 안에 내 인생에 분명 필요할 거야, 싶은 부분들은 사진을 찍고, 기록하고, 기억하려 노력했다. 가능한 책들이 안전할 수 있도록, 습기와 벌레들로부터 책을 보호할 수 있는 보관방법을 찾고 고민하며 지냈다.

하지만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나니. 결국 나는 안방이 좁아지더라도, 책장을 떠메고 사는 쪽으로 마음을 바꾸고 말았고 나의 뚱뚱이 책상과 소중한 장서들은 나와 함께 새 집에서 여전히 잘 지낸다.


누군가는 책을 왜 구입해야 하는지 의문한다. 도서관에서 빌려보는 방법도 있는데 말이다. 물론 사람마다 삶의 방식이 다르듯 독서의 방식도 책에 대한 애착도 모두 다를 것이다. 서로 다른 생각과 가치관을 모두 존중한다. 하지만 내 경우에 독서는 마지막 장을 덮음으로써 쉬이 끝나지 않는다. 좋은 책일수록 그렇다.

좋은 책은, 책을 읽고 난 직후 뿐 아니라 책을 잊고 살아갈 때에도 내 안에 작은 씨앗이 되어 머무른다고 생각한다. 세월이 흐르고, 새로운 경험을 통해 나의 내면이 성장할 때 다시, 새로운 교훈과 감동, 깨달음을 선물하기 위해서 말이다. 엄마가 되어 다시 읽는 <너의 자궁을 노래하라>, <인도로 간 또또>가 내게 전혀 다른 느낌과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처럼.


최초의 어린 날처럼, 내 삶이 절실하게 외로워지는 순간에, 폭풍우에 휩쓸린 듯, 가야할 길이 보이지 않는 때에,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라', 아이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실수하고 말았을 때에, 나는 '내 책'을 찾아 내가 접어둔 페이지를 펼쳐 위로받고 싶다. 도움받고 싶다. 실패와 시련에 좌초하더라도, 성장하고 나아가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비록 식탁 없이 식사를 하고, 거실에 매일 이부자리를 펴는 수고를 할 지언정 책이 없는 집에서 생활하지는 않을 것이다. 밤 늦게까지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있는 방과 언젠가 우리의 2인용 식탁이었던 책상 하나. 일 년에 얼마 씩 '사원복지'로 주어지는, 서점에서 사용 가능한 남편의 문화 카드가 주어짐에 감사하고 감사하며, 나의 사적인 책 수집을 멈추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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