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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니 Oct 06. 2021

이 계절의 리추얼

ep. 78 로쿠(roku) - i like you


뜨겁게 지나간 여름이었다. 여름에 관한 글을 꽤 자주 쓴 것 같은데도 여름이라는 소재는 질리지가 않는다. 여름에는 언제나 설레는 일들이 그곳에 있었다. 그래서 나에겐 매해 찾아오는 이 여름이 재밌고 고맙다.


특히 너무나 소중해 그냥 보내기에 아쉬운 여름밤은 더 그런 소재다. 나에겐 100일이 채 안 되는 멋진 여름 밤들을 부지런히 즐기기 위한 나만의 리추얼이 있다. 리추얼(=반복되는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 다른 계절보다도 유독 여름이 되면 반드시 지키려고 노력해야 하는 이것은 바로 ‘무작정 걷기’이다. 2시간이고 3시간이고 무작정 걷는다.

단 이 두 시간 여의 리추얼은 음악이 없으면 절대로 하지 않는다. 뭐 볼 일이 있으면 그곳에 갈 목적으로 걸을 수는 있겠지만 그럴 바에야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다. 이토록 완벽한 계절에 멋진 에너지를 가진 거리를 음악이 없이 걷는다는 건 참치김밥에 마요네즈가 빠진 것처럼 속이 굉장히 상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걷기 전 완벽하게 세팅된 플레이리스트를 준비해야 하고 볼륨은 주변의 소음을 차단할 만큼 적당한지, 두 시간을 걸을 배터리가 충분한지까지 확인된 후에야 첫 곡의 재생과 함께 첫 발을 내딛는다. 출발지에서 도착지까지 지도상의 거리를 확인해보니 2시간이 나왔다. 마침 신발도 편안하고 가방도 가벼워 걷기에 더할 나위 없다.


두어 시간을 걸어도 지루하지 않은 여름밤의 워킹코스는 광화문에서 출발해 지하철 5호선 라인을 따라 걷는 구간이다. 특히 직장인들의 퇴근 시간인 여섯 시쯤에 맞추어 출발하면 더 좋은데 그 이유는 각 스폿에 도착할 때마다 적당히 멋지고 재밌는 풍경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오후 6시, 광화문과 청계천을 지나며 붐비는 사람들의 에너지를 느낀다. 종로 3가 방향으로 걷다 보면 퇴근하는 사람들 다수와는 반대 방향으로 가야 해서 인도의 많은 부분을 내어주고 좁은 길을 따라 걷는데, 그럴 때면 남들과 다른 하루를 보내는 느낌이라 더 새롭다.


종로 3가와 을지로를 지나는 7시쯤이 되면 퇴근 후 노포 거리에 모여 저녁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의 긴장 풀린 웃음소리가 넘쳐난다. 지글지글 고기 굽는 냄새도 나곤 하는 즐거운 저녁시간에는 또 다른 에너지가 느껴진다.

을지로 4가를 지날 때면 꼭 세운상가에 들러야 한다. 주관적인 생각으로 여름밤의 청계천을 보기에 최적의 장소가 아닐까 싶다. 사람이 붐비는 청계천이 아닌 퇴근길 한번 걸어볼까 싶어 두 발로 또는 자전거를 타고 지나는 사람들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곳으로, 세운상가 옥상에는 주로 나처럼 혼자 온 방문객들이 많다.


오늘은 한 남자가 청계천이 내려다보이는 세운상가 옥상에 앉아있다. 고개를 숙이고 무언가 열심히 노트에 적고 있다. 핸드폰이나 아이패드가 아닌, 조그만 수첩에 볼펜으로 뭔갈 집중해서 적어 내려 가는 모습이 보기 드문 모습이라 더 재미있다. 방해하고 싶지 않아 살짝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발아래 지나가는 사람들을 내려다본다.

어딘가로 향하는 사람들이 올려다보는 내 모습은 또 어떤 모습일까. 조금 외로워 보일까? 아니면 여유로워 보여 부러워 보일 수도 있겠다. 내가 바라보는 그들과 나를 올려다보는 그들은 각기 다른 생각을 갖고 같은 공간을 지난다는 사실이 참 새롭지 않은가.



오후 8시, 동대문 역사문화공원에 도착한다. 서울의 밤 중 화려함과 쓸쓸함이 함께 보이는 곳이 아닐까. 이곳에 올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들곤 했다. 화려한 건물들 뒤로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진 곳에서 오는 쓸쓸한 공기가 느껴진다.


부지런히 걸어 다리가 아플 때쯤 되면 지하철에 올라타 집으로 돌아오는 게 여름밤 추천하고 싶은 워킹 코스.







여름밤 오래오래 걷는 습관은 서울에 온 뒤 더욱 굳어졌다. 활동 반경이 좁던 학창 시절에 비해 성인이 되고 독립을 하면서 가야 할 곳도 가고 싶은 곳도 많았던 나는 부지런히 걸어 다녔다. 걷는 것은 생각의 색감을 더욱 짙어지게 하고 과거의 모습을 반성하게 하고 미래의 풍경을 그려보게 하는 도구가 되어주었다. 모든 일을 놓아버리고 싶을만큼 힘이 들때조차, 무작정 걷는 일은 감정을 다스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늘 온몸에 힘을 주고 살았던 탓에 어딜 가나 ‘몸에서 힘 좀 빼라’는 말을 들었던 나에게 혼자 힘을 빼고 설렁설렁 걷는 행위는 하루의 긴장을 푸는 시간이기도 했다. 달리는 것보다 덜 짜릿하고 자전거를 타는 것보다 덜 후련해도 두발로 땅을 밀어내는 행위 자체를 설렁설렁하게 하는 것이 좋았다. 시간이 날 때마다 부지런히 걸었던 여름밤의 습관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많은 영감과 감성을 가져다주었을 것이다. 조금 더 느리게 여름을 보내려 잡아둘수록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있었다.


무작정 걷는 것은 내가 여름밤을 조금 더 재미있게 느끼는 리추얼이자 여름밤의 낭만을 대하는 예의로, 이렇게 실컷 걷고 나면 그제야 생각이 들었다.



아, 비로소 여름이었다.





https://youtu.be/V871EzHfBCk


이번주 수플레는 여름을 보내는 아쉬움을 안고 써봤어요. 여름을 보내며 오늘도 실컷 걷고 왔습니다. 여름밤 걸을 때 듣기 좋은 노래 한 곡도 함께 들고 왔습니다.


로쿠(roku)라는 가수가 부른 'I like you'인데요. 이 곡은 꼭 무작정 걷고 싶은 여름밤에 들어주셨으면 좋겠어요. 꼭이요!




수요일의 플레이리스트(줄여서 수플레)'는 다섯 명의 브런치 작가가 매주 수요일마다 본인의 에세이가 담긴 음악을 소개하는 읽고 쓰는 라디오입니다. 잠들기 전 이름 모를 누군가가 추천해주는 노래를 듣고 싶으셨던 분들, 즐겨 듣는 노래에 다른 누군가는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궁금해본 적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매주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주시지 않을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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