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뚜라미 Aug 02. 2023

우산을 들고 나가지 않습니다

비가 그칠때까지 커피 한잔 더 해요

내가 지금 머무르고 있는 푸켓은 계절상 우기이다. 한창 쨍쨍한 하늘을 보며 '아 예쁘다-' 하며 사진을 찍는 도중에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는 경우가 하루에도 수차례 반복된다. 처음 며칠은 어딜 가든 불안해서 우산을 항상 챙겼다. 그렇게 변화무쌍한 비의 계절을 삼십일 넘게 겪었다. 어느새부턴가 모든 상황을 철저하게 대비해야겠다는 봉쇄의 마음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까페에서 나른하게 커피를 홀짝이다가도 마른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비가 쏟아지면 안절부절했던 마음이 점차 느긋해졌다. 조급함이 사라진 자리에는 여유라는 멋쟁이가 들어와 자연스럽게 따뜻한 커피한잔을 더 시킨다. 센 빗줄기가 따닥따닥 내려치는 창밖을 멍하니 응시하면서 세 곡 정도의 음악을 고른다. 그리곤 굵은 빗물이 허공을 가르며 높은 하늘과 중간 하늘, 사람과 사람사이의 간격, 그리고 먼지로 뒤덮인 길바닥을 깨끗하게 씻어 내리는 것을 가만히 바라본다. 너무도 평화롭게 정지된 시간이다.


게슴츠레 뜬 눈으로 이번 소나기는 한 이십분 가려나 가늠하면서 요즘 힘들어하는 친구에게 전화를 한 통 할지 짧은 글 한편을 쓸지 고민한다. 그리곤 아주 느릿하게 숨을 고르고 새로 갓 내린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네 문장 정도를 썼다 지웠다 하다 보니 빗줄기가 조금 가늘어졌다. 그새 카페 사장님도 노트북을 들고는 창가 옆 긴 사각 테이블에 앉으셨다. 손님은 나하나 뿐이었지만 사장님은 나와 사장님 부부내외, 그리고 빗소리로 봉인된 카페 내부의 고요한 공기를 의미있게 채우기 위해 플레이 리스트를 과감하게 바꿨다. 여름밤 파릇한 잔디가 상상되는 뉴에이지 피아노 음악이 갑작스럽게 꺼지고, 해질녘 비오는 로마 거리에서 흐를법한 재즈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산미 없이 고소한 커피 향과 찐득한 재즈, 타닥거리는 노트북 소리, 그리고 투덕뚜덕 창문을 내려치는 빗소리의 리듬이 마음을 완전히 무장해제 시켰다. 그리고 나는 더욱 나른해졌다. 언제까지 이 카페에 머물지 나도 알 수가 없다. 음악은 계속되고 금세 잦아들거 같았던 빗줄기는 여전히 제법 세다. 예상이 비껴가는 경험이 예전에는 참 불쾌하고 불안했는데 지금은 마음을 가득채운 여유가 불안함을 지긋이 눌러준다. 뭐 좀 기다리면 되지 급할거 없잖아? 라는 느낌으로. 풍성하고 안온한 기분이 몸을 감싼다.


이제 나는 로브하나만 걸치고 마음 편하게 현관을 나선다. 빗줄기가 더 이상 두렵지 않다. 축축하게 젖은 발의 촉감도 꽤 참을만해졌다. 이쯤되면 환경이 사람의 성향을 바꾸게 한다는 말이 정말 맞는 것 같다. 예측불가능한 모든 것을 두려워하고, 그것들을 통제하지 못하면 불안에 휩쓸렸던 나는 과거가 되었다. 처음 푸켓에 왔을 때 일회용 레인코트를 열 장이나 쟁여두었던 내가 낯설어졌다. 불현듯 하염없이 흐르는 비에도 초연히 시간을 내어줄 수 있게 되었다니. 정말 기적같은 변화다. 부단히 노력해도 얻어지지 않던 마음의 여유가 스스로 내게 달려와 안기는 날이 오다니.


이 글을 쓰다가 우연히 유튜브에 뜬 <오은영리포트- 화산부부> 의 짧은 클립을 보았다. 모든게 정확하고 빠른 아내가 잔실수가 많고 허술한 남편에게 소리를 지르며 답답해 하는 장면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집안의 모든 일에 주도적이지 않고, 계획없이 느릿한 남편에게 아내는 분노하고 있었다. 커피를 마시다 말고 잠시 멈춰서 오늘도 아등바등 일하고 있을 남편을 떠올렸다. 어떤 순간에도 뛰지 않고 느릿느릿 걷는 나의 남편. 그리고 나의 결혼생활 중 많은 순간들이 머릿속에 스쳐지나갔다. 더운 나라의 우기와 같은 내 남편을 나는 얼마나 채근하고 재촉했었나. 밑도 끝도 없이 호기롭게 여유로운 그의 모습에 얼마나 크게 실망하고 화를 내었는가. 이따금 같이 드러누워 조금 여유를 부려도 되었을텐데, 하는 후회가 마음을 쳤다. 영상 속에서 남편분은 똑부러지고 계획적인 아내의 모습에 매력을 느껴서 결혼을 했다고 하였다. 아마 우리 바깥양반도 그랬을 거다. 우리는 본인의 모자란 부분을 채워주는 반려자로 서로를 봤을 것이다.


아무래도 이제 나는 조금 허술한 사람이 되려고 한다. 나사 몇 개 풀고 단추도 몇 개 풀고 느슨해진 마음으로 나를 둘러싼 상황과 사람들을 비가 그칠 때까지 가만히 바라보는 시간을 갖고 싶어졌다. 언제 그칠지 모르는 비도 넓은 아량으로 감쌀 수 있는데 사람인들 못 기다릴까.


비온뒤에 선명해진 푸켓 올드타운의 예쁜 풍경


언제 그치나 재촉하지 않고 기다린 끝에 맑은 창문이 보였다. 창문 너머에는 알록달록 총 천연색의 건너편 건물이 아까보다 더 선명하게 보였다.

비온 뒤 맑음. 사십분 만에 해가 쨍하고 떠올랐다.

따뜻한 커피 두잔과 달달한 카야 베이글을 먹고 마시느라 참 행복했다. 아마 또 비가 올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두려울 것이 없다.


나는 이제 기다리는 게 어렵지 않아졌으니.

기꺼이 멍하게 기다리고 생각하고 또 기다릴 수 있다. 비온 뒤 더 선명한 미래를.






작가의 이전글 정엽에게 위로받은 어느 멋진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