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들 단 잠 주무시길 소망합니다.
나의 유년기와 학창시절의 일상에는 늘 낮잠이 있었다. 학교를 다녀오면 늘 한 두 시간씩 잠을 잤다. 초등학교 저학년까지 체구는 작았지만 무척이나 강한 체력을 갖고 있었는데 어쩐 일인지 해가 거듭되면서 나의 건강은 급격히 나빠졌다. 온갖 잔병과 갑상선 질환들이 매일의 나날들을 무력하고 지루하게 가라앉혔고, 하루라는 사이클의 경계도 흐려놓았다. 긴 밤을 지나 상쾌한 아침이 되어도 휴식과 충전은 충분하게 이뤄지지 못했다. 항상 음침하게 바닥을 기어 다니는 느낌으로 오늘도 어제 같고, 내일도 어제 같은 힘든 하루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래서 나는 남들과 비슷한 일상을 간신히 살아내기 위해 낮잠을 잤다. 그리고 깨어있는 시간에 충분히 밝은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항상 무리해서 나를 끌어올렸다.
이십대에는 오춘기같은 번뇌로 불면의 밤들이 많았다. 나를 두드리는 모든 관계들과 감각들이 짜릿하고 찌릿거려서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사랑하는 모든 것들과 항상 연결되어 있었고 또 개별의 관계 속에서 나는 엑스터시를 한 것처럼 늘 들떠있었다. 아마도 그 행복의 시간들이 일분일초 소중해서 잠에 빠지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마치 내가 잠들면 현생의 즐거운 자극들과 달뜬 마음이 모두 신기루가 되어 사라질 것만 같았다. 낮잠도 밤잠도 멀리하면서 체력은 다시 급강하했다. 그렇지만 마음이 지칠 때마다 젊음에서 뿜어나오는 도취된 기운이 어디선가 솟아났고 그렇게 어찌 저찌 삶을 이어붙이는 느낌으로 짤뚝짤뚝 살아냈다.
아이를 출산한 이후 잠은 다른 국면에서 힘겨워졌다. 서서히 잠들며 수많은 마음의 별을 헤던 시간은 사라졌다. 마치 우물에 툭- 떨어져서 정신을 잃는 것처럼 베개에 머리가 닿는 순간 기억도 함께 잃었다. 그동안 불면증이라는 것을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사람처럼 쪽잠, 통잠 구분 없이 툭 치면 잠들고, 일어나면 타임 슬립을 한 것처럼 하루가 시작되었다. 깨고 싶지 않은 달콤한 꿈 따위가 끼어들 순간은 없었다. 아이를 낳고 한 오년간 나의 잠귀는 너무도 발달되어 옆집 화장실 물 내려가는 소리에도 깨는 지경이 되었다. 내 수면의 시작과 끝은 오로지 아이의 수면패턴에 달려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잠들었지만, 건조하고 얕은 잠은 나에게 따뜻한 회복을 주지 못했다. 수개월에 한번쯤 충분히 자고 일어났다고 생각했을 때조차도 내 몸은 식은땀으로 범벅되었을 뿐 체력장에서 오래달리기를 했을 때처럼 몸이 물먹은 솜뭉치처럼 무거웠다. 더 이상 자면서 꿈을 꿀 수 없어서 속상했다. 더 이상 깨어서도 잠들어서도 기대되는 꿈이 없다는 것이 너무 좌절스러웠다.
서른 중반을 넘어서자 내 수면은 언뜻 자유로움의 영역에 진입한 것 같았다. 남편은 태블릿을 꼭 안고 소파에서 잠들기 일쑤고, 아이도 한번 재우면 거의 깨지 않고 잘 잔다. 그런데 이젠 밤새 대 여섯번을 깬다. 거의 한 시간에 한 번씩 깨는 격이다. 카페인이 문제인가 싶어서 마시는 커피량을 좀 줄여보았는데도 큰 변화가 없었다. 갈증이 나서 그런 건지, 더워서 그런 건지 이유를 찾지 못했다. 벌떡 일어나 물 한잔을 마시곤 시간을 본다. 꽤 잔 것 같은데 새벽 한시다. 다시 얕은 잠에 들었다가 갑자기 또 눈이 떠진다. 아직도 새벽 두시 반. 거실에서 안경을 쓴 채 자고 있는 남편 안경을 벗겨주고 아이 방에 들러 이불을 덮어주곤 다시 잠을 청한다. 곧잘 잠에는 금방 든다. 새벽 네 시, 다섯 시 반 비슷한 패턴으로 자고 깨기를 반복하다가 여섯시 반에 찝찝한 상태로 기상한다. 개운해지려고 혼자 요가를 해본다. 관절과 근육의 뻐근함은 조금 없어졌지만 뇌 주름 사이에 물때가 낀 것처럼 뿌연 기분이 내내 이어진다. 매일같이 운동도 꽤나 열심히 해서 늘상 몸은 피곤한데 깊게 푹 자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지 너무 답답하다. 낮 시간에도 피로함이 이어져서 낮잠을 자보려고 하지만 이제 그것도 쉽지 않다.
스물 세 살쯤 스페인에서 두 달을 산 적이 있다. 낮잠을 자는 시에스타 siesta 문화가 있는 스페인은 나의 두 번째 고향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너무 나른하고 편안했다. 일상의 쉼표같은 낮잠은 나의 힘이었는데 어쩌다가 낮잠 밤잠 모두 힘든 쪽잠인생이 된 걸까. 잠을 푹 자지 못하니 몸이 너무 힘들어서 어제부터 멜라토닌이라는 수면보조제를 먹어봤다. 아직 큰 효과는 없는 것 같지만 플라시보 효과라도 노려보자 생각하며 ‘푹 잘 수 있다’라고 읊조리며 잠에 든다. 잘 먹고 잘 자는 것이 다시 목표가 되어버린 애매한 나이의 어른.
오늘 밤은 깨지 않고 좋은 꿈꾸며 길게 자고 싶다.
버석거리는 시원한 이불을 다리 사이에 끼고 향기 나는 베갯잎에 볼 부비며 잠에 들던
내 삶의 달콤한 시에스타가 다시 돌아오기를.
-이상 잠들지 못해서 실눈 뜨고 쓰는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