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을 우선해서 챙기던 나, 이제는 스스로를 먼저 돌보겠습니다.
여행 갈 때 이런 경험 있으신가요? 여행 준비 중, '나는 어딜 가든 너랑 있으면 다 좋다'며 이야기하는 상대방의 말을 털썩 믿고 여행 준비를 오롯이 혼자 다 한 경험이요. 친구, 연인, 가족을 대신해 여행 준비를 다 한 당신. 막상 여행을 가면 아찔한 상황이 펼쳐집니다. 시간 들여 어떻게든 찾아낸 맛집에 가서는 "짜다", "맵다", "비싸다"등 맛집에 대한 평가가 쏟아집니다. 유명 관광지는 또 어떤가요. "여기보다 저기가 더 좋아 보인다."며 갑작스럽게 다른 의견을 내거나, "생각보다 별로네"라며 필터 없이 솔직한 생각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예시가 과장되었는데요. 사실 주로 부모님, 오래된 연인, 아내/남편, 아이들과 함께 갔을 때 흔히 일어납니다. 죄가 있다면(?) 분명 무얼 먹든, 어딜 가든 좋다고 한 그들을 믿은 죄밖에 없죠. 그들을 챙기고 배려하는 마음에서 여행계획을 짜고 실천했을 뿐인데, 감사는 개뿔. 우리가 한 노력은 알아주지도 않고 오히려 불평만 털어놓는 것을 보면 허망합니다. 내가 이러려고 여행계획을 도맡았나, 싱숭생숭하고. 심하게 말하면 이용당한 듯한 감정도 느끼죠.
친구 사이에서도 이런 일들은 종종 일어납니다. 함께 취업스터디를 하는 친구라고 가정해 봅시다. 취업 준비 중에 스트레스를 호소하며 걱정과 불안을 털어놓는 친구. 원래 일요일까지 기업조사를 해오기로 했지만 불안에 압도되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친구를 대신해 면접준비나 자료 준비를 준비하신 적 있나요? 그리고 그렇게 했을 때 당신의 배려에 그 친구가 감사하던가요? 오히려 그 자료로 당신이 가고 싶었던 기업에 당당히 합격하는 꼴을 보면 이게 뭔가 싶더군요.
직장에서는 어떤가요. 당신의 도움을 고마워하던가요?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매번 배려하고 챙기다 보면 호의와 배려, 챙김을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팀원들이 겪고 있는 문제에 공감하고 해결해 줬지만 오히려 욕을 먹은 적이 있어요. 개인적으로 힘들고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는 팀원을 배려해서 먼저 나서서 감정과 문제를 해결해 주었는데, 어느새 그들의 일은 저의 일(task)로 둔갑해 있더군요. 감사의 표현 따위는 역시나 없었습니다.
사람을 지나치게 배려하고 챙기는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 한 번쯤 겪으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 반복되고 누적되다 보니 '배려 피로(Caregiver burnout)'가 생기더군요.
배려피로는 말 그대로 타인을 지나치게 배려하거나 돌보는 과정에서 심리적으로, 신체적으로 소진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특히 우리처럼 기버(giver)의 성향을 지닌 사람들, 즉 "이 순간 잠시 희생해서 모두가 행복하면 돼"라는 생각으로 친절과 배려를 베푸는 사람에게 잘 일어납니다. 늘 진심으로 상대를 배려하고 챙기다 보니 과도한 에너지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쓰였고, 자신보다 타인을 돌보는 일에 집중하다 보니 스스로를 케어하지 못해 장기적으로 피로, 스트레스, 우울감이 오죠.
자기 돌봄이 부족한 상태에서 남을 지나치게 배려하면, 결국 자신도 타인도 만족할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배려 피로, 더 이상 일어나면 곤란합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타인을 더 우선해서 챙기던 패턴을 부수려고요. 사소하게는 잠이 쏟아지지만 억지로 어떻게든 상대방 위주의 전화통화를 이어가고 호응해 주는 것부터 시작하렵니다. 도움을 요청할 때 필요한 만큼만 응답하려고 해요. 그동안 감사의 표현도 하나 없이 저의 지원과 도움을 당연하게 여겼으니 아마 상대방은 조금 의아할 겁니다. 사적인 시간을 쪼개서 들어주고 도와주던 사람이 그렇게 행동하지 않으니 인연이 끊길 수도 있겠죠. 어쩌겠어요. 저를 그 정도로 생각했다는 것이니, 오히려 잘 되었습니다. 기버는 에너자이저가 아닙니다.
제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 '시간'을 퍼주는 일도 그만할 겁니다. 아무리 친구, 연인, 가족이라도 혼자 해결해야 할 문제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고민하고 당사자가 시간을 들여 해결하는 게 맞습니다. 충분히 당사자가 해결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배려하기 위해 상대방을 공주나 왕자처럼 떠받들고 하녀를 자처해서 행동하지 않을 겁니다. 이제는 주변 사람들도 알아야 합니다. 도움과 시간, 지원은 공짜가 아니라는 것을요.
그동안 남을 배려하며 타인의 기준에 맞춰 움직여온 시간. 이제는 오롯이 저 자신을 돌보기 위해 쓰려고 합니다. 원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과도하게 저자세를 자처했던 나. 과도한 도움과 배려를 제공해 소진된 에너지, 감사함을 모르는 사람들에게서 받은 상처를 보듬어 주려고 합니다. 아마 스스로 돌보는 동안, 오히려 타인과의 관계가 좋아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심리학에 '심리적 자율성 이론(Psychological sutonomy theory)'라는 것이 있는데요. 사람들은 스스로 선택과 행동에 책임을 지며 문제를 해결할 때, 더 건강한 심리 상태와 높은 자아 효능감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원래 자율적으로 독립적으로 행동할 때 심리적인 만족을 느낀다는 것이죠.
하여, 그동안 주저 않고 나서서 드린 자발적인 도움, 지나친 개입은 어쩌면 오히려 상대방이 스스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자율성을 저해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어쩌면 친구와 연인들에게 스스로 자처해서 저에게 함부로 하도록 오냐오냐 키웠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충분히 스스로 할 수 있는 사람인데, 그들의 자율성을 저의 배려로 해쳤으니 - 어쩌면 건강하지 않은 관계는 제가 스스로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네요.
타인을 지나치게 챙기며 생긴 소진(burnout)을 인식하고, 관계에서 도움을 어느 정도 베풀 것인지 그 기준을 설정하고 나를 돌보는 선택. 상대방의 문제를 대신 해결해 주려고 해결사를 자처하기보다는, 각자의 자율성을 존중하며 스스로 해결할 기회를 줍시다, 우리. 그럼 관계는 더 건강하게 변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