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화 4 – 사라진 신화
나는 전학이 잦은 아이였다. 제주에서 ‘국민’학교를 입학했고, 서울에서 2학년 여름방학까지 머무르다가 다시 제주로 내려왔다. 그러면서 할머니와 단 둘이 살던 시절은 끝났고, 아빠 엄마와 함께하는 네 식구 완전체 생활이 시작되었다. 촌에서 시로 전학을 한 번 더 했다.
1986년, 아시안게임이 열린다고 서울에서 제주까지 온 나라가 들썩들썩 했다. 제주에서 이뤄지는 성화 봉송 응원을 위해서 작은 태극기 깃발을 들고 시가지로 나가 열심히도 흔들어 댔다. 뭐가 지나갔는지, 누가 뭘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깃발을 열심히 흔들고, 크게 함성도 지르라는 선생님들의 요구를 성실하게 이행했다. 내가 상기된 모습으로 깃발을 들고 나갈 때면 할머니도 괜히 신나 했다. 이때 아시안게임 대회에는 제주출신의 선수들이 참여 했고, 메달도 땄다. 그게 할머니에게 감동의 눈물을 짓게 만들었다. 국민학생부터 여든 노인까지 흥분하지 않을 수 없는 열기가 제주를 메웠다.
이듬해, 그게 전부는 아니라는 걸 알았다. 1987년의 제주도도, 돌이켜 보건대 뜨거웠다. 어느 날은 전교생의 서랍 안에 내용을 제대로 가늠할 수 없는 유인물들이 한 장씩 들어 있었다. 긴장한 표정의 선생님들이 유인물들을 모두 걷어 갔다. 집으로 하교하는 길에는 차도로 이상한 트럭들이 많이 지나다녔다. 붉은 글씨를 쓴 머리끈을 바짝 동여맨 남자들이 트럭 짐칸에 타고 있었다. 모두들 비장한 표정이었다. 서울에서 지내는 동안 보았던 시위대들과 닮은 남자 어른들이었다. 그게 87년 6월 제주의 공기였다.
그 무렵, 우리는 온 가족의 서울 이주를 계획했다. 마지막 전학이었다.
그때 나는 할머니 심정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제 와 생각하니, 할머니로서는 난생 처음으로 제주를 떠나는 거였다. 할머니는 떠나는 사람이 아니라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늘.
기다리기만 했던 사람이 떠나기로 결심했던 것은, 나 때문이었다. 아빠와 엄마가 제주를 떠나기로 한 이상 언제까지나 할머니에게 나를 맡겨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할머니는 내가 가는 곳은 어디든 가야 하겠다고 결심던 것이다.
할머니는 그때 말했다. 서울 가서 공부 열심히 해서 선생이 되면 좋겠다고. 그거 보고 죽으면 할머니가 여한이 없겠다고. 그때는 모두가 그런 말을 할 때였다. 여자가 선생만한 직업이 없다고, 공무원만한 직업이 없다고.
할머니는 내 손에 가위가 들려 있을 때마다 인상을 썼다. 가위 들면 팔자가 사납다고 했다. 손재주가 좋으면 고생한다고 했다. 당신의 살아남은 유일한 딸이 양장에 재주가 있는 것 같으니, 더 배우게 하면 어떻겠느냐는 얘기를 학교 선생님들에게 들었을 때, 할머니는 반대했다고 했다. 팔자가 사나우면 안 되니까. 할머니가 손재주 좋은 여자였다. 가위질과 바느질을 잘했다.
그래서 엄마는 군인과 결혼했고, 할머니는 내내 당신의 군인 사위를 자랑스러워했다.
1987년 우리는, 무력으로 권력을 찬탈하여 대통령이 된 군인이 자신의 군인 친구에게 권력을 이양하려는 시대에 살고 있었다. 그때로부터 40년 전 어느 봄에는, 그러니까 1947년 4월 3일 이후, 몇 달에 걸쳐 제주의 사람들은 숱하게 죽어나갔다. 우리 집에도, 옆집에도, 그 옆집에도……. 어떤 곳에서는 마을 하나가 통째로……. 사위가 군인이라면, 적어도 그런 황망한 죽음을 당할 일은 없을 것이라는 막연하지만 절대적인 믿음이 할머니에게 있었다. 그 시대를 살았던 거의 모두에게 있었다.
군인 사위를 둔 할머니는 이제 선생 손녀를 원하게 된 것이다. 어쩌면 할머니 인생에서 가장 큰 욕심이 아니었을까. 할아버지가 두 집, 세 집 살림하던 제주를 엄마는 지긋지긋해 했다. 그래도 할머니는 꿈쩍하지 않았더랬다. 손녀를 선생이 되도록 교육을 시키려면 서울에 가야 하는 거라고, 말은 제주도로 사람은 육지로 가야 하는 거라고, 엄마가 할머니를 닦달했다. 인생의 원대한 목표가 생기면 사람은 평생 안 하던 걸 하기도 하는 법이다. 할머니는 고향을 두고 서울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내 옆자리에 할머니가 앉았다.
할머니는 난생 처음 타보는 비행기 안에서 내 손을 꼭 잡았다. 할머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우리는 나란히 앉아 있었지만, 서로 같은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어린 나를 비롯해, 우리 가족 모두 알고 있었다. 남은 인생 동안 할머니가 제주에 다시 돌아올 수는 없다는 것을. 그런 미래를 꿈꾸기엔 신화라는 이름의 여자는 너무 늙어 있었다. 신화는 여든 여섯이었다.
첫 번째 서울 전학과는 다르게 나는 좀 들떠 있었다. 이제 자다가 이웃의 계단에 앉아 있거나 하는 일 따위는 없을 거였다. 지금까지 그런 것처럼 이제부터의 서울에서도 할머니와 나란히 누워서 잠들고 깨면 되었다. 그런 날들이 쌓이면 할머니가 원하던 대로 어느 날 선생 손녀가 돼 있을 수도 있을까.
인생은 꿈꾸는 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기다린 것들은 너무 늦게 오고, 일어날 일들은 갑작스럽게 일어나서 사람을 황망하게 한다.
할머니는 그해 초겨울에 돌아가셨다. 내가 겪은 최초의 죽음이었다.
돌아가시고 난 뒤, 꿈에서조차 할머니를 본 적이 없다. 사춘기를 지나면서 할머니의 마지막 생애를 탕진한 사람이 내가 아닐까, 생각하며 컸다. 괴로운 일이었다. 그렇게 할머니의 마지막을 탕진하고도 나는 선생님이 되지 못했다. 사실은 선생님이 될 생각 같은 건 하지도 않았다. 나의 꿈은 할머니의 꿈과 달랐다.
나는 2010년부터 다시금 제주에 내려와서 살고 있다. 결코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제주를 떠나기 직전에 살았던 바로 그 동네다. 우리가 함께 다녔던 목욕탕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제외하면, 함께 보았던 모든 풍경들이 교체되었다.
나는 있고, 나의 신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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