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 사과 1/3쪽을 나눠주는 남자
2000년, 6월 13일, 점심시간을 막 지난 무렵, 대한민국이 온통 술렁이는 하루였다.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해했다. 사무실마다, 거리마다, 사람들이 둘 이상 모인 곳은 텔레비전을 틀어놓았고, 이런 날이 다 오는 구나하면서 조금씩 상기돼 있었다.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나는 어른이 된 기분이었다. 대통령의 방북과 향후 남북관계의 전망 등을 논하는 선배들 사이에 비집고 앉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우쭐한 기분으로 점심을 먹고 돌아왔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아빠가 쓰러졌어.”
엄마의 다급하고 황망한 목소리.
시청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안양까지 가는 길은 원래 가깝지 않았지만, 그날따라 유난히 멀었다. 너무 멀었다.
나는 위급한 상황이 다 끝난 뒤에나 도착했다. 아버지는 왼쪽 몸을 잘 쓰지 못하게 됐다. 다리를 절게 되었고, 왼손으로는 물건을 집을 수 없었다. 말도 어눌해졌다. 그런데 그 어눌함은 티가 나지 않았다. 그는 어눌해지기 전에도 말이 많은 남자가 아니었다.
1928년, 경주의 어느 가난한 집안 8남매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동아대학에 진학했다가 입이라도 덜 요량으로 군대에 들어갔다. 중간에 육군대학에 진학했고, 졸업한 뒤 내내 군인으로 살았다. 그러다가 대령 이상의 진급은 불가능하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중령으로 제대했다.
중령에 불과했지만 그는 군인답게, 전역 이후에도 흐트러진 생활을 좋아하지 않았다.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우리는 언제나 6시에 일어났다. 그건 방학 때도 마찬가지였다. 저녁 6시 30분에는 무조건 다 같이 저녁밥을 먹었다. 가장 압권은 과일 섭취량이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세 식구가 된 우리는 매 끼니마다 사과 한 알을 1/3쪽씩 나눠 먹었다. 다른 과일이 더러 추가되는 일이 있긴 했지만, 어쨌든 사과 1/3쪽은 반드시 지켜졌다.
나는 언젠가 사과 1/3쪽을 먹는 남자에 대한 글을 썼다가 글쓰기 선생님으로부터 이해할 수 없다는 얘기를 들었다. 반쪽이면 반쪽이지, 그걸 1/3으로 자르는 사람이 어디 있냐며 그가 웃었다. 그런 사람이 나의 아버지였다. 다른 집에서는 그렇게 먹지 않는다는 걸 다 커서야 알았다.
그랬던 그가 혼자서는 몸을 가눌 수 없게 되었다. 모든 게 흐트러졌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군인이었던 그는 전쟁이 일어나면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지 늘 마음에 품고 살았다. 우리가 경기 북부로 이사 가지 않은 이유도, 아파트 저층을 고집한 것도 같은 이유였다. 전쟁에 대한 두려움과 군인으로서의 경계심을 평생 가슴에 앉고 살았던 그는 남과 북의 정상이 만나는 날의 뉴스를 보지 못하고 쓰러졌고, 6월 15일 늦은 밤 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되는 것을 멍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그가 멍한 눈으로 지켜본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2002년 월드컵도 그랬다.
그는 몸을 쓰는 일에는 별 재주가 없는 남자였다. 보통 남자들이 군대에서 얼마나 축구로 날렸는지 그런 얘기를 자랑스럽게 한다지만 나는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가 공을 넣으려고 자세를 잡으면 부대원들이 홍해가 갈라지듯 갈라져 공 넣기에 좋은 길을 만들어주었다는 얘기는 들었다. 수송부대의 장교라는 이유로 무작정 걸어야만 하는 종류의 훈련에 해당사항이 없었다고, 그게 다행이었다고 수줍게 말하는 것도 들었다.
대신 그는 스포츠 보는 것을 좋아했다. 권투 시합이 있을 때는 방 벽에 기대어서 보다가 끝날 무렵에는 텔레비전 화면에 코를 박고 있기 일쑤였다. 보통의 한국 남자들처럼 축구 경기 시청도 좋아했다. 하지만 이길 때도 크게 함성을 지르는 법이 없었고, 지면 그저 ‘에이~’ 하는 게 전부였다. 쓰러진 이후의 그는 소파 팔걸이에 기대어놓은 커다란 쿠션처럼 걸쳐져 있었다, 엄마가 시간에 맞춰 채널을 돌려주었다.
월드컵 4강 진출이 확정되던 순간에 엄마랑 아빠는 서로 부둥켜안고 좋아했다. 인지기능도 신체반응도 현저하게 낮아진 일흔이 넘은 남자의 메마른 눈가에 눈물이 촉촉하게 고였다. 그는 뭐가 좋았을까. 온 아파트를 휘감은, 아니 그냥 이 작은 나라 전체를 집어 삼킬 것처럼 뜨겁고 젊은 혈기가 생의 후반부에 이른 남자를 감동시킨 것일까. 그래서 그는 더 살고 싶다고 느꼈을까.
건강했다면 그의 눈가에 눈물이 맺히는 일은 없었을 거다. 대신 나가서 좋은 과일을 여러 개 사와서 종류별로 1/3씩 나눠 먹었겠지. 어쩌면 세 식구의 갈비 회동이 있었을지 모른다. 그는 기념할 만한 날에는 우리를 데리고 늘 갈빗집에 갔다. 서울에 이사 와서 가장 먼저 한 게, 맛있는 갈빗집까지 가는 버스 노선을 알아 본 것이었다.
사실 나는 쓰러진 아빠에 대해서는 닥치고 있어야 한다. 모든 돌봄은 엄마의 몫이었고 나는 그저 집에 들어와 쓰러져 잠이나 자는 게 전부였다.
퇴근하고 녹초가 되어 돌아와 벨을 누른지 한참인데도 문을 늦게 열어주는 아빠를 향해서 나는 짜증을 내곤 했다. 첫 번째 벨을 눌렀을 때부터 그가 얼마나 서둘러 현관으로 고꾸라지며 뛰었는지, 몇 번이고 비틀거리다가 다시 바로 섰는지, 나중에 엄마에게 들었다. 나는 그런 자식이었다. 아빠가 쓰러지기 전에도 별반 다를 건 없었다. 함께 동대문시장에 갔다가 지하철역에서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그를 나는 창피해 했다. 친구들 부모님보다 나이가 많은 아빠 엄마가 부끄러워 졸업식장에서 외면했다. 가끔 엄마와 교대로 아빠를 간호하면서 아빠에게 이런 일을 사과했다. 치졸하고 비겁한 사과였다. 그는 그때 내가 누구인지도 알아보지 못했다.
아빠는 온몸에 욕창이 번진 채로 2003년 봄, 어느 금요일 새벽에 세상을 떠났다. 주말 내내 날이 화창했다. 장례식이 끝나고 집에 왔을 때, 벨을 눌러보고 싶었다. 문을 열어주려고 몇 번이고 고꾸라지면서 나에게 오는 남자가 보고 싶었다.
이제 우리는 사과를 1/3조각씩 먹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언제나 사과 1/3은 아빠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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