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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아침 Oct 13. 2024

아버지 2- 가장 좋은 시절 혹은 침묵의 시절

<기억의 전쟁>과 전쟁의 기억

가장 좋은 시절 혹은 침묵의 시절 – <기억의 전쟁>과 전쟁의 기억


아버지는 아파트 문을 열고 어딘가로 나가려 했다. 마음은 급했고, 걸음걸이는 어설펐다. 현관문을 향하는 그는 앞으로 고꾸라지듯 걸었다.


“어디로 가려고요?” 내가 물었다.


“저기 나를 데리러 헬리콥터가 왔어. 사람들이 나를 기다려.” 말은 어눌했고, 눈빛은 간절했다.
 
 아버지는 기억을 자꾸 놓쳤다. 최근의 일들을 지우기 시작했다. 그는 과거로 돌아가고 있었다. 당신의 아내이자 나의 어머니를 향해 “당신 누구냐?”고 묻곤 했다. “내 아내는 아주 젊고 곱다.”고 했다. 아내만큼 자신도 젊고 곱던 시절, 사람들이 헬리콥터에서 자기를 기다리던 시절로 아버지는 고꾸라지듯 걸어갔다.
 
 그는 참전군인이었다. 나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평생 모르고 살았다. 베트남에 갔다는 사실은 내게 말해주었지만, 가서 어떤 일을 했는지는 말해주진 않았다.
 
 어느 날 국민학교 몇 학년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아버지를 학부모 일일 교사로 초청할 수 없는지 선생님이 내게 물어왔다.


“베트콩 무찌른 얘기해주시면 좋지! 원래 전쟁 얘기가 재미있잖아? 직접 겪은 경험담인데 얼마나 생생하겠어!“


선생님 이름은 이제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의 표정, 기대감으로 살짝 상기된 표정은 가끔 떠오른다. 그 수업은 성사되지 않았다. 아버지가 거절했다. 이유는 길지 않았다.


“아이들이 들을 만한 얘기가 아니다!”


선생님은 서운해 했다.
 
 베트남 전쟁은 1955년에 발발했다. 1964년에 미국이 개입했고, 한국 정부도 군인들을 보냈다. 베트남 전쟁의 이야기들은 전형적인 방식으로 전해졌다. 우선, 베트남의 ‘빨갱이’들이 얼마나 진절머리 나는 방식으로 싸움에 응했는지. 그럼에도 한국군인들이 얼마나 용맹하게 베트남의 ‘빨갱이’들을 때려잡았는지. 이 파병이 한국이 산업화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얼마나 기여했는지. 민간인 학살의 풍경 같은 건 으레 전쟁에서 있을 수 있는 피해 정도로 축소돼 왔다.
 
 다낭에서 멀지 않은 작은 마을에서는 음력 2월이면 곳곳에서 향을 피운다. 1968년 2월, 한국군이 베트남의 민간인들에게 자행한 학살을 기억하기 위한 위령제가 열리는 것이다. 죽은 사람의 이름은 산 자들에 의해서 호명되는 것이 마땅하다. 이미 역사에서 삭제할 수 없는 전쟁의 기억도 후대에 의해서 자꾸만 기억되는 것이 마땅하다.
 
 책《기억의 전쟁》(이길보라, 곽소진, 서새롬, 조소나 지음, 북하우스 출판)은 수많은 사람, 산 사람과 죽은 사람들의 웅얼거림과 아픈 목소리를 담고 있다. 그 기록은 우리를 민간인 학살의 현장으로 데려다 놓는다. 그것은 나의 아버지가 들려주지 않은 이야기일 수도 있고, 그가 미처 짐작하지 못했던 이야기일 수도 있다. 영화 《기억의 전쟁》의 프리프로덕션과 프로덕션 과정을 담고 있는 이 책 속에는 여러 가지 목소리들이 중첩돼 있다. 영화가 그랬던 것처럼 책은 참전군의 목소리, 전쟁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 그들을 관찰하고 기록한 이들의 목소리까지 얹혀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미약하고 무력하며 용기가 없는 것은 국가의 목소리다. 스스로 밝혀내려는 의지가 없는 목소리. 책임을 넘기는 목소리. "국방부 보유 자료에서는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관련 내용이 확인되지 않았고, 따라서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베트남 당국과의 공동조사가 필요하다"는 식의.
 
 국가는 이렇듯 자신의 책임을 방기할 때는 신중한 태도를 취하는 것처럼 군다. 하지만 지금이 아닌 나중 언젠가로 미뤄두는 전쟁 기록들이 죽은 자를 온당한 방식으로 애도하지 못하게 하고, 증언하는 자의 목을 메이게 한다.


나는 가끔 궁금하다. 아버지가 자신의 가장 빛나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인지, 마음속에 눌러놓은 가장 어둡고 혼란하고 비참했던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인지. 그 전쟁의 시기는  그에게는 가장 활력이 넘쳤던 생애주기였을 거다. 그러나 그는 그 시간을 침묵 속에 묻어 두었다. 생의 거의 모든 기억을 잃어가는 가운데 자기를 데리러 온 헬리콥터를 기억했던 그였는데 말이다.


그는 진즉부터 현충원에 안장되길 거부했다. 어떤 이유인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를 말할 때면 언제나 ‘군인’이었다고만 말해 왔다. ‘참전’을 괄호 속에 묶어 두고 발음하지 않은 것이다. 모르고 싶었고, 모르는 척했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참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내가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나는 그에게 전쟁의 잔혹한 풍경들에 대해서 끝내 묻지 않았다.  아버지가 살아있는 동안 전쟁은 우리 사이의 대화 주제가 되지 못했다.


그를 태우러 왔다는 헬리콥터는 어디로 가려던 것일까. 그 답을 구성해 보려고 《기억의 전쟁》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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