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반항은 결혼이었다

독특함 넘어 불편함 줬던 순간… ‘반항 거리’ 하나는 가지고 가자

by 이웃주민

연재 4



돌이켜보건대, 30대 시절 나의 가장 두드러졌던 개성 표출이자 반항의 순간은 결혼이었다.


나는 8살 연상녀와 결혼했다. 어른들은 문화적인 충격이 커 보였고, 친구와 후배인 밀레니얼들은 사실 크게 개의치는 않는 모습이었다. 처음에는 와 진짜? 그다음에는 뭐 너의 선택이니까. 어떤 녀석은 부럽다는 말까지.


요란하고 화려한 예식장 결혼식은 엄두도 나지 않았거니와 내키지 않았다. 식장은 우리가 일했던 지역사회에 있는 구청 강당과 식당을 빌렸다. 무료로 대관해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속은 우리가 알아서 채우자. 생각해보니 가까이에 있는 평소 알고 지내던 재주 있는 사람들과 자주 이용했던 동네 상점들을 잘 엮고 부탁드리면, 발품은 들겠지만 근사한 잔치를 벌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에게 없고 별로 끌리지도 않는 통속적인 기준을 좇지 말고, 우리가 가진 소박한 자원으로 해보자. 결혼식 제목을 ‘함께하는 마을결혼식’으로 하면 어떨까?(당시 나와 그녀는 도시 커뮤니티 형성을 지원하는 사회서비스 기관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관청을 빌려 로컬에서 엮다

크고 작게라도 인연이 있는 곳들로 하나하나 리스트를 작성했다. 입소문 난 동네 떡집에서 떡을 맞추고, 손맛이 좋다고 알려진 반찬봉사단체 어머님들에게 전, 잡채 등 잔치음식을 부탁드렸다. 자주 이용하는 생협 매장에서 신선한 친환경 과일, 음료와 와인을, 기본적인 상차림은 지역사회에서 어려운 이웃을 고용하여 손수 음식을 만드는 자활기업 ‘행복한 반찬가게’에 요청했다. 피로연 음식을 전혀 준비해본 적이 없는 곳들이지만, 찾아가서 진지하게 취지를 설명하고 요청을 드리니 흔쾌히 한 손씩 맡아서 거들어주겠다고 했다.


장식은 ‘꽃향기’라는 이름의 동네 꽃집에서 화사한 꽃들을 골라주었다. 그들은 출장까지 나와서 우리와 부모님들 가슴에 꽃을 달아 주었다. 봉제 공장을 운영하는, 자취하던 동네의 이웃 아주머니는 결혼 소식을 듣더니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면사포 등 소품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우리는 웨딩드레스도 따로 빌리지 않았다. 주신 소품과 하얀 원피스를 잘 조합해서 근사한 웨딩 복장으로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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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보/안내 문구도 직접 만들고 써서 붙였다


함께 활동하던 마을방송 협동조합 멤버들은 행사 촬영은 물론 이벤트 영상까지 만들어 주겠다고 나섰다. 사진사는 따로 쓰지 않고, 청첩장에 이렇게 공지했다. “모두가 사진사: 카메라, 스마트폰 필수 지참! 여러분이 전하는 한컷, 평생 간직할게요(5장을 뽑아 신혼여행지에서 고른 특별 선물드립니다)”. 실제 무수한 사진들이 쏟아져 들어왔고, 좋은 카메라를 가져와서 사진사 못지않게 찍어준 사람들도 있었다. 정제된 사진보다 여러 각도, 자리에서 각자의 시선으로 촬영해 전해준 사진들이 우리에게 더 소중함은 물론이다. 규격 사진을 따로 찍지 않아, 흔히들 있는 가족사진 몇 컷을 놓쳐서 나중에 아쉬움을 표한 경우가 있긴 했지만.


이렇다 보니 빈 곳들이 많았다. 웨딩 플래너를 거치지 않고 ‘즉석 섭외’한 사람들이 하나씩 손을 거들어줘서 꾸민 자리. 정식 스텝이 없었던지라, 미처 챙기지 못하고 펑크가 난 음향 담당에 심지어는 설거지까지 부랴부랴 하객으로 온 사람들을 투입시키며 민폐를 끼치기도 했지만, 그들은 씩 웃더니 팔을 걷어붙였다. 예상치 못한 풍경에 어리둥절해하다가 나중에는 새롭고 재미있다는 반응이었다. 가지 수만 많은 뷔페 음식보다 몇 가지 선별한 동네 음식이 더 좋았다는 평가도. ‘가장 나다운 결혼식’ 연재를 하던 한 언론의 기사에 다뤄지기도 했다.


독특함을 넘어 불편함을 주다

놀람을 넘어 어른들의 반감과 의문을 샀던 건 축의금이었다. 이왕 살림을 합치기로 큰 결심을 하고 결혼하는데, 꼭 네 거 내 거 나눌 필요가 있나? 축의금 함을 하나로 합쳤다. 그리고 어른들도 동의할만할(우리 양가 모두 천주교 집안이었다) 성경 말씀을 적어 놓았다.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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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몰랐기에 가능한 기획과 배치였다. 결혼식 자체도 치밀하게 준비하고 여럿 조언을 구해서 했다기보다 자연스럽게, 또 ‘감’이 통해서 결행한 측면이 강했다. 준비 과정에서 좋게 말하면 너희들이 알아서 해보라며, 다르게 말하면 큰 지원 없이 양가 부모님들이 한발 뒤로 빠져 있었기에 가능했던 측면도 있다.


이것이 기존 결혼문화의 관례를 크게 건드렸다는 걸 순진하게도 나중에야 알았다. 하객들도 어리둥절해했다. 신부 측 신랑 측이 없네? 어디에 넣어야 하나. 내가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우리 할머니는 “그런 방식으로 하는 게 어디 있냐”며 식이 끝나고도 거듭 당혹감을 표했다. 성격 밝고 내가 좋아라 하는 친척 한분이 “너희는 잘 이해할 수 없거나 불합리하게 여길 수 있을 수 있지만 과거로부터 이어오는 관례도 있으니 그건 존중해 줘야 한다”는 취지로 나중에 문자를 보내왔을 때, 뭔가 크게 결례가 되는 행동을 했구나 라는 걸 깨달았다. 와이프는 결혼 당시 이미 불혹이었는데, 이런 것도 예상하지 못했다니 이 사람도 정말 세상 물정 모르고 살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결혼식 다음 주가 추석이었다. 나는 결혼식 때 양가 친척들 다 인사를 했으니 이번 한가위에는 가지 않아도 양해가 되리라 생각했다. 추석 끝날까지 신혼여행지에 있었다. 그러나 이 역시 어른들에게는 불편함이 있었던 것 같다. 결혼 후 첫 명절인데. 자연스럽게 다들 인사할 수 있는 자리인데 안 오고 여행지에 있어? 친척들 모인 자리에서 아버지는 “니가 가르칠 건 가르쳐야 한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단다. 아버지는 방임에 가깝게 그냥 놔두는 사람이었다.


이제 마흔에 가까워져 생각해보니, 지금 만약 결혼식을 했으면 저렇게 못했을 것 같다. 생각만 앞설 뿐 행동은 점잖은 내가 가장 크게 구습에 대들어본 순간이었던 느낌이다. 세상 너무 많이 아는 것도 탈이다. “상상력에 권력을”, “금지하는 것을 금지하라"고 부르짖었던 1968년 학생혁명 시위에서 청년들은 “서른 이상은 믿지 마라”고 외쳤다고 하는데, 왜 그런지 알 것 같다. 몰랐기에 혹은 덜 물들었기에 저지르는 것이다. 앞으로도 시류에 포섭되지 않는 반항심 하나 정도는 가지고 마흔으로 향하고 싶다. 중년에는 어떤 반항을 또 할 수 있을까.


“개개인의 다양성을 존중하면서 개인과 집단이 조화를 이루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집단주의, 밀레니얼은 이 ‘새로운 집단주의’를 학교에서, 직장에서, 일상에서 직접 몸으로 부딪치며 실제로 구현해내고 있는 세대인 것이다.” - 정지우,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


돌이켜보면, 나뿐만은 아니다. 언제부턴가 개성 있는 결혼 풍경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도 밀레니얼들의 등장과 도래와 무관하지 않다. 결혼 산업화되고 규격화된, 천편일률 눈도장용 체면치레 행사로 점철되고 있는 결혼식을 거부하고, 본인들의 취향과 가치에 따라 특별한 순간으로 채우는 장면들.


절차를 확 줄이고 알맹이만 제대로 전하는 ‘작은 결혼식’을 만드는 흐름. 전혀 감동을 주지 못하는 형식에 큰 비용을 들이기보다는 그 돈으로 인생 추억을 만들기 위해 세상에서 멈춰 서서 세계여행을 떠난 커플. 눈도장 찍고 가는 빛 좋은 예식장 말고 평소 좋아하던 카페를 빌려 종일 편하게 머무르고 이야기 나누며 진득한 축하로 순간을 채운 커플 등. 그렇게 사회에 관심 없고 가치관도 없고 생각도 없다며 질타당하던 밀레니얼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그들의 취향으로 갑갑한 세상을 향해 개성을 불어넣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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