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웃주민 Dec 07. 2021

“나로 인해 너희들의 삶을 파괴하지 마라”

아버지가 남긴 메모

https://brunch.co.kr/@jmseria/76

[아버지를 떠나보내며, 글 이어서]



올해, 집 근처 작은 책방 번역가의 서재에서 ‘남자의 자리’라는 책을 골라든 이유가 있었을까.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가 아버지를 떠나보낸 뒤 쓴 작품이다. 지식인, 부르주아 문화에 가까워진 딸이 노동자, 영세 자영업을 하던 아버지의 삶을 문학적 치장 없이 “물질적 필요에 굴복하는 삶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예술적인 것, 무언가 ‘흥미진진한 것’ 혹은 ‘감동적인 것’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시처럼 쓴 추억도 환희에 찬 조롱도 없을 것”이라고 전하며 쓴 글이다.


그녀는 아버지의 자리를 가공과 포샵 처리 없이 적었다. 그것은 자신이 있던, 있었던, 거치고 지나쳤던, 버리고 떠나온, 떠나오고 싶었던 그러나 여전히 질기게 놓여있는 짙은 흔적의 자리였을 것이다.


지금 나는 가난한가. 부자는 아니지만 운 좋게도 그렇진 않은 것 같다. 나는 가난했나. 어느 정도 그랬던 거 같다. 여유 없이 자랐고 불안정했고 상당 기간 빚지고 쪼들렸다. 나는 성공했나. 이제 여유가 있나. 그것도 아니다. 단지 밥벌이를 해왔고 여전히 구불구불 길 위에 서있다.



#1

그가 노트북에 남긴 메모장을 우연히 발견했다. 가끔씩 기록하던 일기, 적어두고 싶은 정보를 두서없이 모은, 하얀 화면에 글씨만 있는 txt 파일이다. 장례를 치른 직후인지라, 이 내용부터 큼지막하게 눈에 들어왔다. 몇 년 전에 쓴 글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오늘의 유언처럼 있다. 


“제발 항아리에 넣어서 일정 장소에 보관 마라. 그냥 적절한 산하에 뿌려.”

“나는 그냥 당시 복장 그대로 화장해서 산천에 뿌려다오 하려고 합니다. 수백천 년 전에야 묘지가 중요했지만 계속 그리 하다 보면 이 땅이 묘지로 가득 찰 것입니다. 죽으면 자연으로 갈 육신을....”(어디에 댓글로 쓴 내용을 메모해 둔 것 같다)


뒤늦게 발견한 글이지만, 다행히 뜻에 맞게 보내드렸다. 격식을 싫어하던 그에게 알맞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 화장 후 여럿이 같이 묻히는 묘지에 ‘자연장' 형태로 그를 소박하게 묻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유년시절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여유 없음, 빚, 쪼들림, 뒤로 미룸, 형편의 어려움이다. 중1 무렵, 북가좌동 살 때다. 채무자들이 깍두기 머리에 덩치가 엄청 큰 아저씨를 데리고 들이닥쳤다. 아버지는 퇴근 전이었다. 그날이 강하게 남아있었나 보다. “아이들을 어떻게 할까 겁나서 부리나케 집으로....” 나의 뇌리에도 그날 밤은 세게 박혀 있다. 사업하다 빚을 짊어지고 살던 집을 빼서 할머니 집에 들어와 살 때다. 빨간 압류 딱지들이 얼마 되지도 않아 보이는 집안 가구, 가전제품에 덕지덕지 붙어 있던 시절. 덩치 아저씨와 채무자들은 안 그래도 작고 움츠러들어 있는 아버지를 더욱 왜소하고 초라하게 말로 몸으로 몰아세웠다. 그날이 계속 낯부끄럽게 남아있는지, 반복해서 ‘창피....’ 표현과 함께 그 장면이 메모에 적혀 있다. 다른 부분에도 중언부언 쓰여있는데, “애들 해코지 할까 봐 허겁지겁 집으로...” 왔단 내용이 눈에 밟힌다. 나는 그때, 아버지를 사기꾼 취급하던 그들 앞에서 울먹이며 말했다. "우리 아빠 그런 사람 아니예요..."


이후로도 그는 실패했고 또 실패했고 다시 일이 되지 않아 엉뚱한 쪽으로 빠졌고 결국 재기하지 못했다. 나이 들어가며 자기 방 안에서 오랫동안 스스로를 유폐했다. 가족들 보기 민망하고 이해 못 하고 화가 날 행동을 한 적도 적지 않다. 나는 그가 부끄러웠고 싫었다. 그와는 다른 삶을 꿈꿨고 그에게서 도망치고 싶었다.



#2

단절되었던 아버지의 생각과 목소리를 듣는다. 내가 큰 뒤 그는 “나는 너희에게 할 말이 없다...”며 입을 닫곤 했다. 나(+동생)의 어린 시절은 그에게 커다란 기쁨이었나 보다.


“주민이의 ‘매?(왜?) 매? 매?' 소리가 자주 귀에 쟁쟁하다. 뭐가 그리 알고 싶은지, 나 그리고 가족들의 말 끝마다 왜 왜 왜를 연발한다. 즐겁게 일일이 대답한다.”

“주민이 애기 때, 대화 중, 내 한마디 끝날 때마다, 매(왜)? 매? 매? 귀찮을 정도로.... 단 한 번도 짜증 내지 않았던 내가 자랑스럽다^^ 계속 매 매 매 살거라.”

“내 몸이 너희들의 놀이기구, 좌우상하... 말타기 등등.... 두 놈이 동시에 내려 치면 벅찰 때도 있지만, 행복... 방화동(살 때), 할매 할배 오셔서 니들 데려간다고 하신다. 난 어쩌라고(어떻게 살라고)... 말하며 볼멘소리^^”


그는 술을 좋아했다. 눈 감는 순간까지. 초등학생 시절, 술에 잔뜩 취해 밤늦게 집으로 온 날, 잠든 아들들에게 다가와 이뻐 죽겠다는 듯 얼굴을 비볐다. 주민아 주구야(동생을 이렇게 부르곤 했다). 자고 있던 난 잠결에 그를 인지했다. 얌전히 자는 버릇이 없던 나는 대굴대굴 굴러다녔다. 옆에서 술에 취해 잠든 아버지를 발로 뻥 찼는지 아침에 보니 눈에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웃기다는 듯 거울을 보았다. 달걀로 눈 주위를 마사지하며 출근 준비를 했다.


팬더 처럼 멍이 든 눈으로 웃음 짓던 그가 친근하게 떠올랐다. 그래 우리 아빠, 본디 좋은 사람이었어.... 자정이 넘어선 시간이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를 세 번째로 알콜병원에 입원시키고 돌아온 날, 그때도 지금과 같이 눈물이 났다. 흡사 감옥과 같이 빨갛게 통제구역이라고 적힌 입원병동에 그를 데려다주고 돌아오며 돌덩이를 하나 내려놓은 마음의 평안함과 더불어, 억지로 끌고 가서 집어넣었다는 꺼림칙한 기분이 뒤섞여 혼미하고 어지러웠다. 그가 사라진 그의 방을 정리하며, 우연히 이전에 입원했을 때 썼던 노트를 보았다. 병원 생활 동안 주기적으로 진행하는 심리치유 프로그램 시간에 썼던 글로 보였다. 세상에서 가장 기뻤던 순간, 주민이 주구가 태어났을 때, 애들 어릴 때 계곡으로 산으로 나들이 다니던 때, 가장 슬펐을 때, 아내와 법원에서 이혼 절차를 마치고 돌아오는 차에 같이 타서 운전하며 돌아오는데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진 날, 다짐하는 것, 애들 괴롭게 하지 않기.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애들을 위해서 술을 끊자. 읽다가 붉어진 눈시울로 집 밖으로 나왔다. 고개를 떨구자 눈물이 쏟아졌다. 


서른 무렵, 어렵게 홀로 자취하던 시절이다. 반지하 단칸방을 나와 작은 임대아파트로 이사하던 날, 아버지가 용달 배달일을 하던 다마스 차를 몰고 왔다. 함께 목장갑을 끼고 그가 직접 만든 허름한 구루마를 같이 끌며 비교적 수월하게 돈 안 들이고 이사를 마쳤다. 짐을 다 나르자 녹이 잔뜩 슬어있는 창틀이 보였고 그는 그것을 지워주겠다며 한참을 서성이며 자리에 남았다. 보태줄 건 없지만 뭐라도 할 수 있는 건 끄집어내어 해주고 싶은 마음이었을까, 짐을 다 나르고도 자리를 좀처럼 떠나지 않는 그를 보며 나는 오랜만에 아버지를 느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이다. 이 땅에서 자리잡지 못한 그는 저 멀리 미국으로 떠났다. 당숙이 앞서 자리를 잡고 있던 곳으로, 자신에게는 새로운 도전이라며, 앞으로 좋아질 거라며, 특유의 자상한 표정으로 우리를 안심시키며 떠났다. 배웅하러 나가기 위해 그는 학교 선생님께 양해를 구하는 편지를 썼다. 경제적, 가정적으로 어려운 형편이라 직접 찾아뵙고 말씀드리기는 부끄럽다며. 서예도 곧잘 했던 수려한 손글씨로 그는 친구들 사이에서 ‘악마’로 불리며 무서웠던 선생님께 글을 남겼다.


체벌이 당연시되던 학교에 경찰차가 등장하던, 교실붕괴의 문화가 여기저기 침투하던 새천년 혼돈의 시기였다. 아버지의 편지는 선생님을 감동시켰고, 교실 모든 친구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낭송되었다. “편지는 이렇게 써야지. 아버지 참 좋은 분이시네”. 그동안 사정이 어려웠고 새로운 기회가 생겨 미국으로 가지만 앞으로 저 대신 잘 부탁드린다고. 엄하게 해서라도 아들 교육 잘 시켜주시길 당부드린다고. 악마 선생님은 읽자마자 흔쾌히 공항에 가보라고 말했다. 



#3

결국 아버지가 세상에서 떠나갔다. 바닥까지 보이고 갔다. 더 이상 나락으로 갈 곳마저 없었던 것일까. 정말 더 이상 못 볼 모습을, 반복되는 부담을 지우지 않기 위해 그랬던 것일까(그의 말년을 함께 지내며 겪은 일은 언제 솔직, 담담하게 정리해볼 생각이다. 나이 듦, 돌봄, 가족, 병, 중독, 감정과 이성, 책임, 부양의무와 사회적 지원 등 함께 고민해보고픈 생각과 경험을 나누고 싶다)


아버지는 본인이 점점 흐려지고 있음을 직감했나 보다.


“혹 내가 치매로 가출하더라도 찾지 마라. 그냥 경찰에 신고하고 연락만 기다리는 정도. 운 좋으면

만나겠지?^^ 어차피 갈 건데 쓸데없이 에너지 낭비 마라. 찾아서 모시면 뭐하냐. 서로 교감이 있어야 가족이지.... 나로 인해 너희들의 삶을 파괴하지 마라. 가끔 그리우면 사진 보면 되잖아.”


참, 그 다운 글이다. 이제 원망은 없다. 급작스레 그가 없는 세상이 되고 홀로 선 밤이 깊었다. 매몰차게 대했던 순간이 크게 떠올라 괴롭다. 용서를 구한다. 더 신경 쓰지 말라는 것이 그의 마지막 유지다. 존댓말 하면 버럭 했었지? 모질고 거친 세상 순진하고 여린 사람이 휩쓸려 사느라 고생 많았어. 아빠, 안녕, 훌훌 편히 잘 가.



매거진의 이전글 아버지를 떠나보내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