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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도서관에서] 익숙한 공간, 낯선 풍경

시끄러운 도서관에서 조용히 자신을 돌아본다

by 김종섭

요즘은 아내 출근길에 함께 집을 나선다. 아내와 직장 근처에서 인사를 나누고, 나는 늘 맥도널드로 향한다. 작은 사이즈 커피 하나를 주문해 창가에 앉으면, 적막한 아침 공기와 함께 조용한 자유가 깃든다.


사실 낮 시간에는 이곳에 잘 오지 않는다. 한국인이 많이 모이는 시간대이기 때문이다. 특별히 한국인이 싫은 건 아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한국인이 많은 곳은 자연스럽게 피하게 된다. 딱히 이유를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그 공간에 있으면 괜히 내 행동이 어색해지는 느낌이 든다. 솔직히 부자연스러울 이유는 없는데도, 마주치게 되는 상황이 어쩐지 불편하다. 이런 감정은 나만의 문제는 아닌 듯하다. 주변의 많은 이민자들도 비슷한 감정을 털어놓곤 한다.


커피를 마신 뒤 도서관으로 향한다. 창밖이 정면으로 보이는 자리를 골라 앉는다. 테이블은 없지만, 혼자 앉기에 안성맞춤인 1인용 소파형 의자를 굳이 선택한다. 노트북 대신 스마트폰이 글쓰기 도구가 되어 준다. 덕분에 요즘은 브런치스토리에 다양한 주제로 글을 자주 올리고 있고, 때로는 언론사에 송고할 기회도 자연스레 늘고 있다.

▲도서관 창가에 비치된 1인용 소파 의자. 푹신한 착석감과 햇살이 어우러져, 장시간 머물러도 몸이 무겁지 않고 마음은 가벼워진다.

고요해야 할 도서관은 일명 ‘도떼기시장’을 연상케 한다. 예의를 지키려는 듯 소곤소곤 전화를 받는 사람부터, 주변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큰 소리로 잡담을 나누는 사람까지 행동하는 모습이 다양하다. 이곳은 도서관이라기보다,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휴게소에 가까운 분위기다.


이런 상황이 마음에 쓰이면서도 ‘내일부터는 이런 도서관엔 오지 말아야지’ 다짐하지만, 오늘도 또 같은 자리에 앉아 있다. 여전히 산만하고, 여전히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나 자신은 흐리고 맑음을 되풀이한다. 어쩌면 시끄러운 도서관에 적응해가고 있는 걸까. ‘도서관은 조용해야 한다’는 원칙이 깨졌다. 이젠 다소 시끄러워도 되는 건 아닌지, 의심마저 든다.


도서관 관계자도 제지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큰 소리로 동년배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그래서 요즘은 ‘캐나다 도서관은 원래 이렇구나’ 하고 애써 인정하려 한다.


마치 두 사람이 한 사람을 가지고 바보 만드는 모양새다. 다수가 아무렇지 않게 대화하고 떠드는데, 나만 정숙을 원하고, 그것이 원칙이라 믿고 있으니 내가 바보가 된 기분이다. 어쩌면 그동안 당연했던 것들이, 이제는 당연하지 않게 바뀌는 것을 인정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어디에다 물어볼 수가 없다. 이곳에선 그저 그런 분위기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시끄럽게 대화를 해도 해답은 “No problem.”지금 도서관의 정서이다.


도서관이 조용해야 한다는 것도 어쩌면 내 관점에서 지금까지 옳다고 여겼던 고정관념일 수 있다. 물론 한국에서는 도서관에서 큰 소리로 이야기하거나 대화하면 즉시 퇴장 명령을 받을 것이다. 아니, 그런 일이 애초에 벌어지지 않는다. 이미 도서관의 기본 규칙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도서관이 고요하고 쾌적한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청소년들은 도서관보다 오히려 시끄러운 카페에 모여 공부한다. 그렇다면 그들에게는 그런 소란한 공간이 오히려 더 집중이 잘 되는 장소일지도 모른다. 만약 그 말이 맞다면 굳이 도서관이 꼭 고요해야 할 이유도 없는 셈이다. 오히려 시끄러운 캐나다 도서관이, 도서관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는 오히려 최적의 장소일 수도 있다.


결국엔 도서관에서 정숙을 요구할 필요도 없을지도 모른다.


내가 머물고 있는 장소가 카페였다면, 도서관에서 누군가 큰 소리로 대화해도 예민하지 않았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도서관처럼 카페를 이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격히 말하자면 구분된 기능이 있는 공간은 담아낼 그릇의 유형이 다르다. 어디까지나 도서관은 도서관 나름의 기능이 있고, 카페는 카페대로의 기능이 있다. 큰 대접에 담아내야 하는 것을 작은 밥그릇에 전부 담아낼 수는 없는 것처럼, 담아내는 ‘그릇’이 다르다. 용도에 따라 그릇의 모양과 크기도 달라진다. 다만, 그릇의 용도보다는 모양을 중시한 또 다른 그릇도 존재한다. 그 그릇이, 어쩌면 ‘카페’를 담아내는 그릇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동안 내 기준에 익숙했던 도서관도 이곳 캐나다에 와서는 낯설게 느껴진다. 마치 세 살배기 아이가 사물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되묻듯, 낯선 곳에서 마주하는 익숙한 것들조차도 되물어 보고 싶은 충동과 함께 생소하고 낯설다. 그럼에도 나에게 필요한 건, 그 낯선 것들을 적응해 가야 했다. 견디는 힘보다는 수용힘이 필요하기도 하다.


이것저것 떠드는 소리를 귀에 담아 가며, 변하지 않는 심정어(心情語)로 글을 쓰다 보면 어느새 점심시간을 지나, 시계는 오후 2시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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