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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의 낯선 마트에서 만난 ‘평화’라는 단어

주유비 절약, 한적함, 그리고 만년설까지, 46km를 달리는 작은 여정

by 김종섭

우리 부부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코스트코에 장을 보러 간다. 집 근처 10km 반경 안에도 코스트코 매장이 두 곳이나 있지만, 우리는 일부러 46km 떨어진 소도시의 코스트코를 찾는다. 조금은 엉뚱하고 번거로워 보일 수도 있지만, 이 선택은 팬데믹 시절에 시작된 작은 습관에서 비롯되었다.

처음 팬데믹이 창궐했을 무렵, 모든 문화 시설과 여행지가 문을 닫았다. 마스크를 낀 채 사람 많은 공간에 들어가는 것도 꺼려졌고, 바깥 활동은 거의 제한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비교적 한적한 도시로 드라이브도 할 겸 장을 보러 나가게 됐고, 그때의 경험이 지금까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우리가 찾는 그 코스트코는 다른 매장에 비해 훨씬 한가롭다. 넉넉한 주차 공간, 복잡하지 않은 동선은 장 보는 스트레스를 줄여준다. 게다가 주유비도 더 저렴하다. 우리가 사는 밴쿠버보다 리터당 평균 10센트가 싸고, 코스트코 주유소를 이용하면 추가로 10센트가 할인되어 50리터 주유 시 10달러 이상을 절약할 수 있다. 이런 경제적 이유도 있지만, 사실 더 큰 이유는 바로 '드라이브의 즐거움'에 있다.

도로 사정도 좋다. 집 근처에 톨게이트가 있어 고속도로 진입이 쉽고, 목적지인 코스트코 역시 고속도로 출구와 가까워 접근성이 뛰어나다. 차량 정체만 없다면 왕복 1시간 반이면 충분하다. 비용을 아끼는 실속도 있지만, 이 여정엔 소소한 여유와 계절의 변화를 느끼는 재미가 더해진다.

어제도 그곳으로 다녀왔다. 고속도로를 달리며 차창 밖 풍경을 바라보다가 문득 눈길이 멈췄다. 전방에 펼쳐진 산등성이 위로 하얗게 남아 있는 만년설이 보였기 때문이다.

▶고속도로에서 바라본 여름의 만년설. 자연이 준 시원한 선물 같은 풍경이었다

2014년 1월, 처음 캐나다에 이민을 왔을 당시엔 도시 인근의 산들 위에도 눈이 늘 덮여 있었다. 그땐 산에는 늘 나무가 있듯, 이곳 산엔 사계절 내내 눈이 있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기후 변화로 인해 그런 만년설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지금은 특정 지역에서만 겨우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다. 그래서일까. 여름에 보는 만년설은 단순한 경치 그 이상이다. 시원함을 선물해 주는 동시에, 계절을 초월한 자연의 위엄을 느끼게 한다.

코스트코에서 쇼핑을 마치고 계산하고 있을 때였다. 그 순간, 계산을 돕는 직원의 흰 티셔츠가 눈에 띄었다. 앞면에 ‘평화(平和)’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적혀 있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직원들은 자율적인 복장 위에 회사에서 지급한 로고가 새겨진 검은색 조끼를 입고 있었지만, 그 직원은 조끼를 착용하지 않아 티셔츠 문구가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평화(平和)’가 적힌 티셔츠를 입고 있는 캐나다인 직원. 이민자의 마음을 뭉클하게 만든 장면..

나는 반가운 마음에 그 문구를 가리키며 “평화”라고 짧게 말을 건넸다. 직원은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계산대 주변이 분주한 시간이라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진 않았다. 그 짧은 순간, 특별히 오간 말은 없었지만 나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비록 한글은 아니었지만, ‘평화’라는 한자 단어를 보는 순간 이상하게 마음이 따뜻해졌다. 중국, 일본, 한국 등 한자를 쓰는 나라들이 공유하는 글자이지만, 어느 나라 글자냐를 떠나 그 안에서 '공통된 문화의 울림'을 느낀 것 같았다. 타국에서 살아가다 보면 아주 작은 것 하나에도 고향의 기운을 느끼게 된다. 익숙한 음식, 간판, 단어 하나가 주는 감정은 설명하기 어려운 위안이 된다.

코스트코에 처음 갔을 때, 한국 제품이 진열대에 놓여 있던 걸 보고 얼마나 반가웠던지. 이후로는 갈 때마다 ‘숨은 그림 찾기’처럼 한국 제품을 찾아내는 즐거움도 생겼다. 누군가는 별것 아니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민자에겐 그 작은 것 하나가 위로가 된다.

그래서일까. ‘외국에 나가면 애국자가 된다’는 말이 요즘 더 실감 난다.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일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괜히 가슴이 뭉클해지는 건 단순한 향수가 아니라, 타지에서 살아가는 이민자의 정체성과 감정이 만들어내는 자연스러운 반응 아닐까. 코스트코에서 마주한 그 짧은 장면조차 내게는 일상 속의 작은 애국심으로 다가왔다.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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