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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불러준 순간, 들꽃은 꽃이 되었다

한국에서 캐나다까지, 들꽃에게 말을 거는 산책자의 이야기

by 김종섭
▶사진 설명: 갈라진 인도 틈에서 피어난 작은 노란 들꽃. 이미 시들어가고 있었지만, 여전히 아름다웠다. 무심한 바닥 위에서 묵묵히 피어 있던 생명의 흔적.

문득 나태주 시인의 시 한 구절이 떠올랐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요즘 들어 그 말이 유독 가슴 깊이 스며든다.

한국에 살 때는 늘 바삐 걷기만 했다.
잠시 멈춰 선다는 것조차 쉽지 않았고, 길가에 핀 꽃 한 송이에도 눈길을 줄 여유가 없었다. 숨 돌릴 틈 없이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나는 늘 앞만 보고 걸었다.

하지만 캐나다에 와서 삶의 속도가 느려지고, 마음의 숨결도 느슨해지면서 어느새 길 위의 작은 풀들과 눈을 맞추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땅을 바라보며 걷는 일은 내게 낯선 일이었지만, 점점 익숙해져 갔다.

그렇게 어느 날, 갈라진 인도 틈에서 작고 노란 꽃 한 송이를 마주했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던 자리에 조용히 피어 있던 꽃이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참 예뻤다. 나는 한참 그 앞에 서 있었다.

며칠 전, 이 글을 마무리하기 위해 다시 그 자리를 찾았다. 처음 만났던 순간을 사진으로 남기지 못한 것이 아쉬워 뒤늦게 카메라를 들고 갔다. 그러나 그 꽃은 이미 칠월의 햇살 아래, 시간이라는 절벽 아래 서서 시들어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다시 한참을 바라보았다. 시든 모습에서도 이상하게 더 깊은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마치 생의 마지막 순간에야 비로소 전해지는 진심처럼 말이다.

우리가 그 꽃을 ‘잡초’라 여긴 것은, 예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단지, 자세히 보려는 마음의 속도를 맞추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짧은 수고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민들레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른 매력을 가진 쑥부쟁이 꽃. 풀섶 속에서 조용히 피어 있다

길을 걷다 보면 인도 옆 자투리 공간엔 언제나 잡풀이 무성하다. 그 속에는 쑥부쟁이도 피어 있고, 블루베리 넝쿨도 가시를 바짝 세우며 자라난다. 처음엔 민들레인 줄 알았던 꽃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매력을 지닌 쑥부쟁이였다.

사람들은 왜 이런 꽃들을 ‘잡초’라며 뽑아버리려 할까. 존재 자체를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는 익숙한 시선. 그저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너무 많은 생명을 지워왔다.

나 역시 예전에는 그랬다. 꽃이 눈에 들어오기 무섭게, 일상의 호흡처럼 지나쳐버렸다. 아름다움을 느낄 겨를도 없이, 무의식처럼 외면하곤 했다.

하지만 요즘은 다르다. 산책길에서 만나는 풀 한 포기에도 발걸음이 멈춘다. 이름 모를 들꽃이든, 무심히 피어난 산꽃이든, 이제는 모두가 내게 말을 건다. 그 자리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다.

7월의 둘째 주 어느 날, 산책로 옆 숲길에서 무성하게 자란 고사리를 보았다. 봄이면 사람들의 손길이 닿기 전, 연한 새순을 꺾어 나물로 무쳐 먹던 고사리였다. 하지만 그날 본 고사리는 키가 훌쩍 자라 숲의 한켠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미 채취의 시기를 지나버려, 더 이상 음식 재료로도 쓰이지 않을 고사리. 그 순간 나는 이상할 정도로 경외심을 느꼈다.

인간의 탐욕 어린 손길에서 벗어나자, 고사리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누구의 눈길도 닿지 않게 되자, 자연은 비로소 본연의 아름다움을 드러냈다. 우리가 그동안 보지 못한 것이 아니라, 고사리 스스로 “나는 그냥 풀일 뿐이다” 하는 마음으로 위장술을 쓰고 있었던 건 아닐까 싶다.

▶산속에서 만난 노루귀, 산괴불주머니, 달맞이꽃… 이름을 알게 된 순간부터 더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날 산책길에서 만난 이름 모를 들꽃들. 나는 눈을 맞추고, 조용히 마음으로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그 순간, 그들은 '풀'이 아닌 '꽃'이 되었다.

달맞이꽃, 노루귀, 벌개미취, 산괴불주머니, 쑥부쟁이…
이름을 하나씩 떠올리며 조용히 불러보았다. 그 이름들은 낯설지 않았다. 어릴 적 동네 뒷산에서 마주했던 바로 그 꽃들이었다.

꽃은 국경을 모른다. 한국에 있든, 지금 이 낯선 캐나다에 있든 그들은 늘 그 자리에 피어 있었다. 세상이 바뀌고 풍경이 달라져도, 꽃은 변함없이 나를 반겨주었다.

그리고 나는 그들 앞에서, 내가 오히려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조용히 받아들였다. 이름을 불러준 순간, 들꽃은 꽃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 꽃 앞에서 한참 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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