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쿠버 쇼핑몰에서 만난 아트박스, 한글로 이어진 따뜻한 장면 하나
도서관에서 돌아오던 오늘 오후, 햇살이 너무 뜨거워 자연스럽게 쇼핑몰 복도를 따라 집으로 향했다. 그 길목에서 낯익은 간판 하나 앞에 멈춰 섰다. 바로 '아트박스(ARTBOX)’였다.
이전에도 몇 번 본 적은 있었지만, 통로를 지날 때마다 이름까지 인식하지 못한 채 무심코 지나치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왠지 모르게 그 앞에 발걸음을 멈추고 매장을 유심히 쳐다보있다. 어디서 본 듯한 익숙한 이름이었다. 기억을 더듬자 한국에 있을 때 자주 보던 브랜드였다.
밴쿠버에서 다시 만나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알아보니 아트박스는 1984년 한국에서 시작된 문구·팬시용품 전문 브랜드로, 최근엔 일본, 미국, 캐나다 등지에도 진출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오늘의 이야기는 브랜드 자체보다, 그 안에서 우연히 마주친 한 장면에 대한 것이다.
매장 안은 한국과 다름없이 알록달록한 문구류와 아기자기한 팬시용품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한글로 '슬기로운 소비생활'이라고 적힌 공책이었다. 영문으로는 cash book, 공책 안을 들여다보니 용돈기입장 노트이었다. 어린 날이 생각나 한참을 손에 들고 들여다보게 되었다.
공책 옆 진열대에는 다양한 볼펜류가 진열되어 있었다. 많은 불펜 중에는 붓펜도 있었다. 예전 밴쿠버의 몇몇 문구점을 돌며 붓펜을 찾았지만 구하지 못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반가운 마음에 붓펜 하나를 집어 들고, 진열대 앞에 붙어 있던 테스트 용지에 글씨를 써보았다.
“붓펜.” 그리고 이어 무심코 내 이름 석 자도 또박또박 적었다. 글을 다 쓰고 나니 괜히 민망한 마음이 들어 지우려다 말고, 매장을 한 바퀴 둘러보기로 했다.
몇 분 뒤 다시 테스트 용지 앞에 섰을 때, 뜻밖의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내가 남긴 글 옆에, 또 다른 손글씨가 조심스럽게 적혀 있었다. '밴쿠버 한인교회…'라는 문장까지는 또렷하게 읽혔지만, 그 뒤로 이어지는 글은 흘려 써서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건너편 쪽에서 엄마와 함께 쇼핑하고 있는 한인 아이가 남긴 흔적인 듯했다.
낙서처럼 시작된 내 글씨가, 누군가의 손끝에서 또 다른 한글로 이어진 순간.
그저 팬시 매장 한쪽에 붙어 있던 테스트 용지였지만, 나에게는 작은 도화지처럼 느껴졌다. 서로를 알지 못한 채, 같은 언어로 나란히 흔적을 남긴 그 장면이 왠지 모르게 따뜻하게 다가왔다.
모국어는 정체성의 뿌리
돌아오는 길,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먼저 한글을 쓰지 않았더라도, 그 아이는 아마도 자연스럽게 한글로 썼을 것이다. 매장 안 곳곳에는 한글로 쓰인 한국 제품이 많았고, 이민 사회에서 자란 아이들에게도 여전히 한글은 생활의 일부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둘째 아이도 초등학교 2학년 때 캐나다로 왔다. 이제는 성인이 되어 영어가 훨씬 편하다고 말하지만, 여전히 한글로 사자성어를 말하고, 가끔은 한글로 문장을 또박또박 적기도 한다. 어릴 적 함께 읽은 한글 동화책과 집에서의 한국어 대화가 자연스럽게 언어의 뿌리가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한인 자녀들이 캐나다 생활 속에서 모국어를 점점 잃어가고 아이들도 있다. 학교와 친구 관계 속에서 영어가 중심이 되다 보니, 한국어를 굳이 써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는 아이들일 것이다.
그래서 오늘 내가 본 그 한글 낙서한 줄이, 왠지 더 소중하게 느껴졌다. 언어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기억을 지키고 관계를 잇는 다리다. 밴쿠버의 쇼핑몰 한쪽, 작고 평범한 테스트 용지 위에 남겨진 한글은 그래서 더욱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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