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우체국에 들려 인터넷으로 주문한 소포를 수령해 올 때가 있기는 하지만, 오늘은 전과는 달리 물건의 부피가 예사롭지 않다.
아내는 아들이 가지고 온 상자가 궁금했던 모양이다. 아들방으로 들어가 몇 마디 나누는가 싶더니 채 몇 분도 안돼서 방에서 나왔다.
"준우 아빠, 방금 전 현우가 들고들어온 큼지막한 상자가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그렇지 않아도 궁금하던 차에 아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다가오는 밸런타인데이에 여자 친구에게 줄 선물이라고 하네요"
"선물!! 어떤 선물을 샀길래 상자가 저리도 커?"
"글쎄요, 물어보기가 좀 그래서 물어보지는 않았는데 사실 저도 궁금하기는 하네요"
"그나저나 밸런타인데이가 언제인데"
"아직 멀었어요"
아내도 정확한 날짜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눈치였다.예전 같으면 생일만큼이나 관심 있게 기억해 냈을 만한 날이다.
핸드폰을 드려다 보니 밸런타인 데이가 2월 중순 한 복판 위에 딱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예전에는 염두에 두고 날짜를 챙겼는데 왠지 이제는 낯선 느낌이 든다.
"아직도시간이 많이 남았는데 어떤 선물을 주려고 미리부터 챙기니라 저리 야단법석을 떨까, "
순간 아들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가 않았다.
"아니, 저런 정성 백 분의 일만이라도 부모에게 베풀면 효자 소리 들을 텐데"
인상을 잔뜻 찌푸리고유쾌하지 않은 푸념을 무의식적으로 아내 앞에서 내 뺏아 버렸다.
갑작스러운 돌발된 행동에 아내가 아들을 거들고 나섰다.
"준우 아빠는 우리 연애할 때 부모님 한테 했던 행동을 한 번쯤은생각해보고 그런 소리 하는 거예요?"
"역지사지 [易地思之]한번 해보세요. 자식 탓만 할 것이 아니라 본인의 과거 행적을 잘 생각해 보시고 말씀하셔야지요"
아내의 말을 듣는 순간 강한 무엇에겐가 한방 얻어맞은 기분이다. 사실생각할것조차 없이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란 말을 전적으로 동의한다. 지금 아들의 행동이 젊은 날 나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이런 상황을 두고 요즘 속어로 쓰이고 있는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이 적절한 표현이 아닌가싶다.
아내와 7년 연애 끝에 결혼에 성공했다.
아내와는 첫사랑이다. 이성의 감정이 가슴으로 전이되기 시작한 최초의 시점부터가사랑의 시작이라고 본다면아내와 나는 첫사랑이 맞을 것이다. 지금도 상황은 비슷하겠지만 옛날에는 첫사랑의 결혼성공률은 거의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고헤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누구나 사랑을 하면 가슴으로 한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연애할 당시사랑이라는 열정의 마음을 단 하루도 소홀하거나 뒷전으로 미루어 본 적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연애 기간을 길게 가지고 가다 보면 사랑이 정으로 바뀌어 결혼에 성공할 확률이 높다고 했다.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사랑을 할 때 둘만의 사랑의 언어는 뭐든 설레고 감미로운 단어가 되어갔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이 듣기엔 그보다 유치한 말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연애 시절 의무감처럼 되어버린 일이 생겨났다. 밤늦도록 하얀 종이 위에 연애편지를 가득 써 내려가는 일이 생겨난 것이다. 간혹 사랑의 감정 지수가 높아지는 날을 만나면 얇은 대학노트 한 권 분량정도는 거뜬히 소화 낼 수 있는 내공이 생겨났다. 그때는 뭐가 그리도 할 말이 많았는지 지금에 과거를 돌아보면 거의 미스터리에 가깝다.
결혼생활 이후자연스럽게 꼭 필요로 하는 경조사만을 챙겨가는 일에 서로 충실했다. 사랑이 식은 것일까.아니면 사랑이라는 것이 관심 밖으로 밀려난 것일까, 가끔 의문을가져보게 된다.
사랑이란 수식어가 지구 상에서 제일 많은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을까 싶다. 반면, 사랑의 수식어만큼이나 사랑의 변명거리 또한 만만치 않게 많다. 피곤해서. 바빠서. 애들 때문에. 등등 어떤 구실이든 붙이기만 하면 변명이 되고 구실이 된다.
사랑이란 살다 보면 덤덤할 때가 있다. 어느 노래 가사처럼 "사랑이 지겨울 때가 있지"라는 말을 때론 인정하고 산다. 사랑을 연애시절 감정으로 살면 얼마나 좋을까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오랜 결혼 생활 끝에 어쩌면 지나친 관심과 애정으로 인해 사실 피곤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나이를 먹어가는 것이겠지"라는 변명을 억지로 나이에 갔다 붙여도 본다. 하지만, 뭐든 편한 것이 좋은 나이가 된 것은 확실하다.
사실 올 3월이면 아내와 나는 결혼 30주년을 맞이하게 된다. 30주년이라는 의미는 오랜 시간을 별 탈없이 자식 낳고 잘 살아가고 있다고 서로를 축복해 주고 아낌없는격려도 함께 해주는 기념비적인 날이 아닌가 싶다. 그 이외도 같이 나누어 갈 수 있는 신선 몰이 이벤트도 준비해야 하는데 아직까지도 계획을 정해 놓지 못하고 시간만 까먹어가고 있다.
대부분 30주년 정도가 되면 정성도 정성이겠지만 솔직히 기념이 될만한 값비싼 선물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 통속적인 우리의 정서라고 머릿속은 기억하고 있다. 물론 내가 습득한 논리가 아닐 수도 있다. 생각은 반응을 하는데 행동은 반응이 느려진 것이 탓일까, 미리 생각해 두고 준비해야 될 듯도 한데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다. 아들이 미리 준비성 있게 준비하는 것이 나를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언제부턴가 나도 모르게 가지고 있던 성향이변한 듯하다.
사람은 속물인지라 무조건 비싸야 사랑의 깊이가 있다는 것을 머리는 내내 되새김질한다. 내 아내만큼은 작은 선물이나마 정성에 감동하길 바라고 있다. 어찌 보면 남편으로서 도독 놈 심보 같은 것이다. 하지만, 오랜 세월 살아온 탓에 아내가 원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대충은 알듯 하다. 통계학적으로접근해보면 대부분이 여행을 첫 번째로 선택한다. 아마도 아내도 예외는 아닐 것 같고 두 번째로 무리를 해서라도 다이아 반지 내지는 유명 브랜드 가방 정도를 생각해냈을 것 같다. 물론 사치성이 있어서가 아니라 일반적인 기념일과는 차별화된 십 년 단위로 묶은 기념일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나의 예측이 거의 흡사하게 맞을 가능성이 높다.
여행을 선택한 목적은 새로운 여행지에서 신혼의 꿈을 다시 재연해보고 싶은 욕망이 비중감 있게 작용했을 것 같다.
다이아 반지는 사실 결혼 예물에 포함되지 않았었기에 남들처럼 받아 보고 싶은 생각 때문일 것이다.
가방은 대부분의 주변 지인들이 명품 가방 하나쯤은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한 부러움이 작용했을 것 같다.
긴 세월감 덕분에 이제는 사랑이라는 정체성에 대한 정의를 어느 정도는 알 것 같다. 젊은 날에는 꾸준히 사랑받기를 원했다. 사소한 것마저도 챙기지 못할 때에는 사랑이 식었느니. 변했느니 다툼의 빈도수가 높아가고 사랑 안에는 늘 전쟁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사랑은 끊임없이 서로에게 관심을 가져다주는 일이 최고의 선물인 듯싶다.
아들의 선물 하나로 생겨난 이야기가 과거의 나의 사랑에 행적을 두서없이 소환해 보게 된 계기가 된 것 같다. 과거 젊은 날 아빠를 닮아 있는 아들의 열정적인 사랑을 더불어 응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