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하고 250일이 넘었다. 이 시간은 나를 되돌아보게 했다. 가족을 돌보고 이해하고. 다 안다고 생각한 것도 다시 보는 시간.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 좋아하는 것을 찾기. 최근에는 딸아이가 듣는 노래가 더 많고 그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노래가 많다. 네가 좋아하는 것과 내가 좋아하는 것을 구별해 내기 어렵다.
언제부터인가 나에 대해서 쓰기가 더 어려웠다. 너에 대해 가족에 대해 쓰는 것이 더 쉬웠다. 나와 하는 대화가 적었던 나다.
ENTP와 ISTJ
올해 들어 MBTI를 여러 번했다. 자녀와 하는 대화법 강좌에서, 집단상담에서, 자녀를 기르기 위해 자신을 알아야 한다며 MBTI를 활용했다. 공짜가 아닌, 찾아서 받는 혜택. 돈주고 사면 한 세트에 만원 꼴이라는데.학교에서 진행하는 강좌나 가족센터 상담도 내가 낸 세금이 들어간거라네.
아무튼, 마음챙김을 십년넘게 알려오신 상담사가 과거말고 현재인 '시제'를 맞추라는 말이 테스트에 도움이 됐다. 그리고 남눈에 비칠 나 말고 지금 나.
일을 하면서 후천적으로 내가 만든 나와, 본연의 나를 재발견했다. 직장에서 모나지 않게 밥값하려고 세상의 소금, ISTJ로 살았던 나는 내가 만든 나였다. 거꾸로 생각했는데 말이다. 주어진 상황에 적응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이번 주, 내 MBTI는 E 보통 N 보통 T 분명 P 약간, 유심히 살피면 ISTJ 친척이다. 그래프로 그리면 서로 멀지 않다. 완전히 분명한 E도 아니오 N도 아니다. P도 약간. J엄마 밑에서 길러져정리된 상태를 지향하지만 혼자 살았다면 뭔 상관? 했을 P다.
일을 그만두니 나는 오히려 사람을 찾아다니고 에너지를 밖에서 얻는다. 계획을 세워도 허술하거나 바뀌는 것을 즐기고 갑작스러운 상황에 그다지 언짢지 않다. 100% P 남편과 결혼하게 된 것 역시, 의외성과 즉흥성을 즐겼기 때문이지 않을까. 천상 TJ인 줄 알았는데. 가족상담사에 따르면 P 묻은 J라고한다.
처음 E가 나왔을 때 말도 안 돼, 내가 테스트를 잘못했군 했다. 일을 할 때는 직장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가족을 돌보는 데에 일주일이 바빠서 본연의 내 욕구를 숨겨놓았나 보다. 결혼 전에 직장인밴드나 동호회를 찾고 새 친구 만나는 것을 즐겼는데, 내가 나를 잊고 살았다.
그럼에도 딸이 나를 극 T로 본 것은 테스트도 증명했다. 어릴때는 극 F였는거 같은데.. 후천적으로 극T를 만든 주범인 엄마로서 딸을 위해 더 노력하고 공감을 더 많이 노력하겠습니다.
내 안의 너, 불편한 나와 마주하기
아무 이유 없이 누군가 불편하다면, 그 속에 내가 싫어하는 내 모습이 있다고. 수영을 싫어하는 아이를 매주 설득해서 보낸다던 그 엄마가 내 머릿속에 한 번씩 나타나는 이유를 깨달았다. 안쓰럽고 떠올리면 불편했다. 그 속에서 내 맘에 안 드는 내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상황을 통제하고 싶어 하는 집착과 내 생각이 옳다며 자기 확신이 강했던 나를 거울로 마주한 듯한 느낌.
프로돌봄러 생존스킬 : 자기 확신과 통제집착
날 때부터 어디 자기 확신이 강하고 통제 혹은 질서에 집착했을까? 전혀. 자유분방한 막내딸로 우수한 두 언니들 아래 대기만성형이었고 그둘을 제치고 관심을 끌려다 보니 잘 웃어제꼈을 테고 울었을 거라는 게 상담사의 해석.
어릴 적 나와 지금 나는 완전히 다른 인간이다. 시 쓰기와 벚꽃 잎을 좋아하던 감성충만 소녀는 가정을 지키고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쓰다 보니 온몸에 가득 찬 감정과 눈물과 웃음은숨겨놓고 냉혈한 아니 극 T로 다시 태어났다.
가정을 지키는 것에 사명감이 필수요, 지키기 위해서 희생되는 것도 많다. 희생이라고 말하기 싫은 이유는 그렇게 지켜낸 즐거운 우리 집에 딸과 아들이 내 입꼬리를 올리게 하고 큰소리로 웃게 하고 살게 하니까. 둘은 나를 살게 하는생명수다.
장마, 비
장마가 오기 직전 흐린 날씨는 참 아름답다. 물기를 머금은 공기와 마냥 회색빛은 아닌 하늘, 어제 날씨가 딱 그랬다. 곧이어 비 내리는 날씨를 반갑게 맞이할 수 있었다. 물을 좋아해서 그런가 비도 좋다. 밝은 날 찾아오는 해도 좋다. 이번 장마는 길고 또 길 것이지만 마음껏 즐길 거다. 내 마음에 불안과 기쁨처럼 세차게 비내린 다음 떠오른 해를 맞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