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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디김 Aug 02. 2024

분노조절과 학교폭력

타해, 자해, 내탓 | 자기애, 자아존중감 사이

사이버 괴롭힘, 학교 폭력과 분노 조절이 머릿속에 떠나지 않는 주제다.


올해 교육청으로 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에 다녀왔다. 퇴직한 교장이 주로 맡는다는 위원장 및 상담사, 변호사, 학부모 대표위원이 교대로 질문했고 다소 딱딱하게 느껴질 수도 있었지만 마이크와 녹음기를 앞에 두고 시종일관 질문에 차분히 답한 아이가 새삼 놀라웠다.  


마지막에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냐며 엄머에게 발언권을 주셨다. 그런 시간이 있을지 몰랐지만 뭐라도 해야지 싶어 며칠 전부터 종이에 생각을 정리해 놓았었다. 한 달을 학교를 못 갔지만 그 자리에서 당당하게 할 말을 다 끝낸 딸이 대견해서 그랬는지, 모지리 엄마가 울컥했다. 왜, 학교와 폭력이라는 단어가 같이 있어야 하느냐는 그 울분. 정글같이 어린이집과 유치원에서 서로 엉켜 자란 아이들이 학교만 가면 그 모든 것이 폭력이라 이름지어지고 학폭위에서 모든 걸 다루어야 하는지.. 어른 세계를 똑 닮게 설계된 학교라는 정글. 법과 재판이 지배하는 세상, 그래서 법 기술자들이 판을 치는지도.



학폭, 학폭위의 폭력성


한참을 말없이 종이만 바라보고 있었다. 머릿속으로는 '너 학폭 신고할거야?'라고 내 아이를 둘러싸고 호기심과 걱정이 섞인 눈길로 묻고 또 물었다던 작년 그 아이들이 떠올랐다.  우리 아이는 교실문 근처에서 십여명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들었던 그 질문.


그 장면을 내눈으로 직접 보지 못했지만 담임과 딸을 통해서 알았다. 또래 괴롭힘과 사이버 왕따 놀이는 공기처럼 함께 하는 환경. 누가 방조자, 공범인지 스스로도 헷갈릴 지경이고 신고당하면 사과문을 쓰거나 생활기록부에 남을까봐 무서워하던 아이들이 순진한거였다.


학폭이라는 단어는 그 또래 아이들에게 폭력적인 단어였고. 응당 학폭을 신고했어야 하는 딸은 그러겠다고 답을 하는 순간 폭력을 행사하는 것 처럼 되어버리는 아이러니.


오히려 집단 괴롭힘을 이끌던 아이는 태연히 교실문 그 무리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과연 저 애는 어떻게 반응할려나 호기심만 가득한 그 머릿속. 그리고 무심히 행해진 2차 가해들.



분노조절과 괴롭힘 상관관계


그애만 문제인가 뭐. 머리를 꽝하고 때린 아이도. 분노가 마음에 가득 차면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되는데, 어른 아이 가리지 않고 남을 괴롭히는 이들이 많다.


그들이 남을 괴롭히는 행위는 어디서 연유하고 그 화는 어디에서 왔을까? 왜 누구는 자기를 탓하고, 왜 누구는 남을 괴롭히는 걸까? 그렇다면 남을 괴롭히는데 혈안이 된 '그 애'들은 왜 그럴까? 타인을 괴롭히고 해를 끼치는 것이 습관이 된 것일까? 남을 힘들게 하고 자신이 한 말과 행동 때문에 괴로워하는 타인을 보면 본능적으로 쾌감 혹은 재미를 찾아 버릇하나?


자해하는 아이들은 주로 그 행동이 남을 해롭게 하지 않는다고 여기기 때문이라고 상담사 샘이 말했다. 자기 몸을 해하는 동시에 부모나 자신을 아끼는 사람을 괴롭힌다는 생각을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거꾸로 해석하면 타인을 해하는 아이들 역시 그 괴롭힘이 남을 아프게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



'네가 감히 내게 뭐라고 했어? 그럼 내가 본때를 보여주지!'


그애는 아직도 또래를 괴롭히고 따돌리고 따돌려진 아이는 못 견뎌 전학 가게 만들고 그렇게 결속되는 비슷한 류의 아이들만 친구로 만드는 버릇을 버리지 못했다고. 너는 아직도 연락이 닿는 다른 친구를 통해 그애의 근황을 알고 인근 학교로 그애 때문에 전학 갔다던 친구 얘기도 듣게 되었다.


나는 예언해 본다. 비슷한 친구들과 어울려 놀다가 서로가 서로를 배신하고 살 것이다. 아마도 꽤 긴 시간 그렇게 지내다가 내게 누가 남았나? 하는 날이 오려나? 어느 순간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해서 철이 들고 착한 아이가 될까? 딱히, 그러길 바라지도 그럴 것 같지도 않다.


올해 네 머리를 꽝 쳐서 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에 소환된 그 아이가 개발새발 발로 써서 보낸 사과문을 보니 우리가 굳이 그런 애들에게까지 희망을 찾으려 애쓸 여유가 없구나.



장난인데 왜 진지빠냐 


별로 안 아프게 때렸는데 아픈데 때려서 미안. 이런 사과문. 난 너랑 친해지려고 한 장난인데 미안. 네가 오해하게 만들어서 미안. 그간의 괴롭힘은 다 증발되고 면피를 위한 사과문.


참 한결같다. 놀다가 장난친 것이고 놀다가 열받아서 한 대 때린 것이다. 누군가를 때려서 아파하는 친구를 보고 누군가를 해하고 험담을 퍼뜨려서 다른 아이가 자기 때문에 힘들어하는 모습을 확인한다. 본능적으로 위력을 과시하려 들고 그렇게 자기 힘과 존재감을 인정받는 애들. 어렸을 적에 아무리 울어 젖혀도 아무도 안 챙겨줬을까. 주변에서 나 좀 봐줘하고 우는 울음에 그러든가 말든가 무시를 했을까.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이 인식이 없으면 그런 일이 발생할 수 다. 그들의 탯줄은 왜 끊겼을까? 어떻게 다시 이을 수 있을까? 남과 공감하는 법을 모를뿐더러 어릴 때부터 자신을 아껴주는 중요한 타인을 갖지 못했을 것 같다. 자연스레 자아존중감도 충분히 형성되지 않았을 것이다. 자기애와 우월감은 후천적으로 커졌을진 모르겠다.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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