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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호진 May 28. 2019

회사에서 내가 챙긴건 자존심이었다.

학벌이 뭐라고 그것에 나는 연연했을까?

어디 학교 나왔어요?



당당히 나의 학교를 말하지 못했다.


작년에 같이 근무한 후배가 있다. 그 친구는 참 똑부러졌다. 나보다 한 살 어렸지만 업무 역량은 훨씬 뛰어났다. 그의 진가(?)를 알게 되면서 후배를 신뢰하게 되었고, 애정을 갖게 되었다. 나에게 살갑게 다가와준 덕분에 이런 저런 고민들까지도 나눌 수 있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처음부터 후배를 신뢰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와 같이 일하기 시작할 무렵, 그의 출신학교를 알고 나도 모르게 선입견을 갖게 되었다. 그 후배는 지방대 출신이었다. 회사 내에서 워낙 유능했고, 각종 공모에서 상을 휩쓸다시피한 친구였기에 그 후배의 출신학교가 명문대가 아니라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리고 후배의 학교에 놀라는 나 자신을 보며 씁쓸해하기도 했다. 대학을 졸업한지 10년도 더 넘은 사람인데 언제까지 출신학교를 가지고 판단해야 하나 싶었다. 학벌이 중요하지 않다고 겉으론 말했지만 나 스스로 학벌을 따지는 사람인 것 같아 창피했다.

"좋은 학교 나왔는데 생각보다 별로다"


나는 서울대학교를 나왔다. 누구나 가고 싶어하는 학교를 졸업했다. 학교에 다닐 때에는 나름 당당했는데, 회사에 들어오고나서부터 서울대 출신이라는 사실이 부담스러웠다. 사람들에게 떳떳이 말하는 게 두려웠다. 사람들이 뒤에서 수근거릴 것 같았다. 생각보다 내가 잘하지 못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서울대를 나왔다고 해서 일을 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잘못된 학벌주의일 수도 있다. 스스로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오만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사회적 기대에, 나 또한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남들보다 잘 하는 게 당연하다는 사람들의 생각에 나 또한 동의했다. 하지만 회사에서, 나는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하기 어려웠다.


금융에 대한 전문 지식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대학 때부터 취업을 위해 차곡차곡 준비했던 것도 아니었다. 아나운서를 해보겠다고 깝쭉거리고 다녔다. 경영학을 공부하지도 않았다. 사회학과를 나왔다고 하지만 사회학적 지식을 갖추지도 않았다. 이도 저도 아닌채 졸업장만 갖고 있을 뿐이었다. 회사에서 내가 쓸 수 있는 재능이 무엇인지도 몰랐기에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다만 창피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을 뿐이었다. 사람들이 뒤에서 나를 수근거리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뿐이었다. 회사에서는 이미 내가 어디 학교를 나왔는지 다들 알고 있었기에 욕만 먹지 않아야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나의 출신학교가 부담스러웠다.



당당하지 못했으면서 인정은 받고 싶어했다.


재미있는 건, 학교를 밝히는 게 부담스러웠으면서 나를 대우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이 나를 알아줬으면 했다. 능력은 없지만 "핵심부서"에서 "핵심요직"을 갈망하기도 했다.


영업점에서 1년 근무를 마치고 맨 처음 맡은 본부 업무는 관리회계였다. 회계에 대해 1도 몰랐기에 업무가 어렵기도 했다. 하지만 문제는 어렵다는 것 자체가 아니었다. 사람들이 관리회계에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아 서운했다. 관리회계는 중요한 의사결정을 위한 자료를 만드는 업무였지 중요한 의사결정을 하는 업무가 아니었다. 뒤에서 묵묵히 데이터를 받쳐주는 역할을 해야 했다. 동기들이, 물론 막내라 허드렛일 전담이었겠지만, 주요 부서에서 핵심 파트의 일을 하는 것을 보면서 회사 인사 담당자들이 원망스러웠다. 나를 알아봐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찬밥대우를 받는 것 같았다. 신입 때만이 아니었다. 회사를 다니면서 내내, 남들이 나를 인정해주지 않을 것 같으면 나도 모르게 나의 출신학교를 떠올리기도 했다.


나 서울대 나왔는데...


난 참 이상한 사람이었다. 내가 좋은 쪽으로만 해석하려 했다. 내 능력을 의심 받을 것 같으면 감추고 싶었고, 내 욕심을 부리려면 드러내고 싶었다. 그렇게 오락가락 했다.


내가 챙긴 것은 자존심이었다. 


얼마전 지인의 블로그를 통해 자존심이 무엇인지 읽게 되었다. 익숙한 내용이지만 훅 다가왔다. 지인은 자존심의 몇가지 특징에 대해 설명했다.


기본바탕에 '남들과의 비교' 를 전제로 한다.

비교로 인한 인간의 감정을 자극하는 2가지 경우가 '비교우위'와 '비교열위' 이며, 비교 우위는 '자만심' 이며, 비교 열위에서 느끼는 감정은 '열등감'이다.

'자존심 상한다' 라는 말은 상대적인 열등감을 느낀다는 표현이다.

자기가 가진 것들과 상대방과의 끊임없이 비교하는 마음은 언제나 나는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남들에게 보여지는 그들의 이미지가 중요하기 때문에 자기에게 맞지 않는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타인의 눈에 비친 인생을 살아왔기 때문에 자기의 인생을 산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 잘 보이기 위한 인생을 위해 힘들게 살아와 영혼은 허전하고 허기져있다.  

[출처] 네이버 블로그 자존심 VS 자존감|  작성자 미라클 사비트리


자존심의 특징들을 하나씩 읽어보면서, 내가 챙긴 것들이 자존심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남들과 비교하며 내가 부족한 게 들키지 않았으면 하면서도, 사람들이 나를 대우해줬으면 했다.


물론 회사라는 시스템에서 타인과의 경쟁은 불가피하다. 그 속에서 경쟁해서 우위를 지켜나가는 것이 생존을 위해 필요한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될 상황에서 경쟁심을 발휘하는 게 나에게 무슨 이득이 있었을까 싶었다. 결국 내가 챙기고 싶은 것은 나의 자존심이었다는 게 아쉬웠다.


 휴직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며 달라지고 있다.

휴직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학교에 대한 나의 집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다행히 사람들은 나의 학교에 관심이 없다. 굳이 그런 지표가 필요없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바라봐준다. 그 속에서 경쟁 또한 무의미하다. 그냥 서로를 응원해주고 모두다 잘 되는 것을 바랄 뿐이다.


사실 출신학교에 대해 연연하는 게 웃긴 일이다. 12년 동안 열심히 공부해서 다닌 학교지만 이미 학교를 졸업한 지 15년이 되어 가는데, 그 사이에 학교 말고 내세울 게 없다는 게 더 이상한 것 아닌가?


얼마 전 지인이 나에게 해준 말이 딱 맞았다.


"호진님은 지금 스스로를 브랜딩하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 속에 꾸준함과 휴직 그리고 다양한 호진님의 캐릭터가 녹아있어요. 그 속에는 호진님의 출신학교 따위는 없어요. 사람들은 더이상 서울대라는 프레임으로 호진님을 바라보지 않아요"


자존심을 챙기는 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결국 중요한 건 나 자신이었다. 나 자신에 충실하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럴때 나의 매력이 더 도드라질 수 있다. 누가 인정하든 상관없이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매력으로 말이다.


이제는 내가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가 부끄럽지도, 대단하지도 않게 됐다. 다행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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