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화 대신 안전화를 신은 채 마주한 세상
당장 먹고살기 힘들고 빚과 부채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안전보건은 사치인가.
중대재해처벌법이 발효된 후 기업에서는 그 시기에 안전관리자, 보건관리자를 대거 채용하기 시작했다. 그중 보건관리자 자격 조건으로는 간호사, 산업위생관리기사자격증 소지자, 관련학과 졸업생 등이었다. 그래서 간호사 출신의 보건관리자를 우리는 ‘산업간호사’라고 한다. 어찌 보면 나는 산업간호사가 된 것이다.
300인 이상 사업장은 무조건 안전보건관리자를 선임하는 것이 법적으로 정해졌다. 그래서 나는 간호사 면허로 보건관리자에 선임되었다. 처음 입사하고 나에게 주어진 업무는... 없었다. 입사 교육? 없었다. 이상했다. 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몰랐다. 심지어 보건관리자는 이 현장에 나 혼자였다. 건강관리? 그거 하면 되는 거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보건교육? 교육하러 나가면 되는 거 아닌가, 그런데 누구에게 해야 하는지. 솔직히 입사 후 일주일은 멍만 때렸다.
이렇게 일하다가 월급 받고 사는 건가. 이게 우리네 간호사들의 삶인가? 이게 말로만 듣던 그 워라벨? 이렇게 일할 수 없어서 산업안전보건법을 펼쳤다. 보건관리자의 업무, 법적 선임 요건 등 읽어 나갔지만 읽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저... 현장에 나가봐도 될까요?”
그렇다. 난 누군가의 건강을 관리해야 하는데 주체도 목적도 모른 채 사무실에 앉아있기만 했다. 현장을 왔다 갔다 하는 시공관리자들과 안전, 품질관리자들의 뒷모습만 봤고 눈치껏 인사만 했다. 이게 내 일은 아닐 거다. 그래서 입사 후 처음으로 뵌 선임 안전관리자와 현장에 나가기로 했다.
“이건 안전벨트, 안전모, 각반, 그리고 안전화야. “
처음에 입고 신는데만 10분 넘게 걸렸다. 지금은 10초 컷이지만 그때는 아무것도 몰라서 선임 안전관리자가 내 몸에 맞게 착용하는 법부터 끝까지 다 알려주셨다. 현장에 대한 나름의 기대감을 안고 업무차량으로 동료들과 2-3분을 달려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나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런 데서 일하지?’
말로만 듣던, 영화와 드라마에서만 보던 공사판 그 자체. 그리고 노가다.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다. 내가 이런 곳에서 일해야 한다고?
도착하자마자 충격이었던 건, 고막을 뚫는 소음과 그 옆에서 아무렇지 않게 일하는 근로자들. 모래 먼지로 뒤덮인 현장에서 마스크 하나 착용하지 않고 일하는 모습. 병에 노출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쯤 되자 근로자들의 건강상태가 궁금했다. 하지만 나는 환자들만 대해봤지, 건강한 성인 남성들을 대해본적이 없다. 다가가는 것조차 어려웠다. 애기가 왔다고, 아가씨가 왔다고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하는 근로자들도 있었다.
겁이 났다. 내가 여기서 일해도 되는 건가, 혹은 여기서 일하는 것이 맞는 건가. 그렇게 현장을 순회하고 컨테이너에 들어왔다. 회의실로 꾸며져 있었고 협력사라고 불리는 여러 건설사 안전관리자들이 모여 있었다. 얼떨결에 처음 온 신입 보건관리자라고 소개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중 유일하게 여자 안전과장님이 계셨다. 동질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느껴지는 포스와 아우라를 보고 감히 다가갈 수가 없었다. 사무실로 돌아가려는 찰나, 과장님께서 처음으로 한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세연프로님 할 거 많으시겠다. 앞으로 힘들겠어요. 보건은 무조건 여러 번 말해야 사람들이 알아들어요! 닦달하고 요청하고. “
사실 저 때 무슨 말씀인지 몰랐다. 그래서 사무실로 돌아와서 퇴근까지 많은 생각을 했다. 모두가 퇴근 한 시간, 다시 산업안전보건법을 펼쳤다. 해야 할 업무를 큰 틀에 나누어 적고 누구에게 말해야 할지도 몰라 다음날 같은 안전보건팀인 선임 안전관리자에게,
“타 현장 보건관리자 선임분께 교육받고 오고 싶습니다. 경력 있는 분께 하루라도 좋으니 보내주세요. “
그렇게 나는 2일의 교육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 역시 회사는 학교가 아니구나. 내가 알아서 얻고 찾아가야만 하는 험난한 곳이었다. 어쨌든, 바로 옆 현장이 같은 회사라 보내주셨다. 그곳에는 간호사는 아니지만 산업위생기사 자격을 소지하고 계시는 보건관리자 분을 만날 수 있었다. 그분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 험난한 나날 속에서 오아시스를 찾은 듯한 소중한 인연을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