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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I 박하림 Sep 06. 2020

가본 적 없는 곳에 대한 그리움 02

만난 적 없는 이에 대한 애틋함



그 이후로 스물 두 살까지의 일은 기억도 잘 나지 않습니다. 그냥 시키는 공부를 하고, 쓰라는 글을 쓰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구역질 하듯 원서를 써내고, 합격 소식을 받은 대학 몇 개 중 한 군데를 아무렇게나 골라서 갔습니다. 아, 아무렇게나는 아니었고, 예술가가 되고 싶다는 열망을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가지게 되었던 터라 뉴욕으로 갔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납득시킬 수 없는 열망이었죠. 물리학과 화학에 심취해 있던 애가 갑자기 예술가가 되겠다는 소리를 하면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게 더 이상한 일일 겁니다. 그렇지만 나는 적어도 나 자신만은 스스로의 마음의 소리를 진지하게 들어야 한다는 걸 익히기 시작했던 즈음이었고, '인생 뭐 있냐'는 애늙은이 같은 생각을 머릿속 깊이 박아두었던 터라 그냥 밀어 붙였습니다.


내가 유학을 다녀왔다고 하면 몇몇 사람들은 직접 말은 안 해도 유학 밖에는 답이 없었던 케이스였구나, 속으로 생각하는 듯한 눈빛을 비칩니다. 나는 그런 눈빛을 보는 게 재밌습니다. 일단 내가 갖지 않은 것(마음만 먹으면 유학 보내줄 수 있는 부모의 재력 같은 것)에 대해 그들이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이 이상하고, 한때는 공부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게 생겼던 내가 당연히 공부를 못해서 유학을 갔을 거라 생각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그래서 일부러 더 설명하지 않습니다. 어 맞아, 난 부모 덕 봐서 뉴욕에서도 살다 왔는데, 별 거 없더라, 엄마 아빠가 나한테 돈 낭비만 더하지 싶더라고, 그래서 그냥 때려치고 들어왔어. 이 말을 잘 교육받은 부잣집 딸처럼 무해하고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내뱉으면서, 듣는 이의 열등감을 후벼 파는 것을 즐기던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나는 분위기와 흐름에 등떠밀려 유학길에 올랐던 것이고, 당연히 해결책이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도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곳에 돌파구가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애초에 기대가 너무 없어서 찾을 생각도 안 했었습니다. 그냥 위안을 찾아다녔습니다. 뉴욕대학교 학생에게 주어지는 공연, 전시 혜택을 만끽하면서 메트로폴리탄과 모마, 휘트니, 링컨센터 등을 쏘다녔고, 한때는 렘브란트의 자화상에 미쳐서 오후 내내 같은 전시실에 앉아 있기도 했습니다. 모마에서 하는 설치 예술 특별전들도 빼먹지 않고 챙겨보러 다녔고, 나중에는 첼시의 갤러리 투어도 매주 한 번씩 하러 돌아다녔습니다. 


이 즈음 나는 어린 시절 나를 매혹했던 나만의 세계를 완전히 잃어 버린 상태였습니다. 잃어버렸을 뿐 아니라 잊어버리기까지 했습니다. 현대의 뇌와 정신에 관한 철학에는 '철학적 좀비(philosophical zombie)'라는 개념이 사용되는데, 사고와 행동은 인간과 동일하게 하지만 어떠한 감각과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존재를 가리킵니다. 가령 고통을 발생시킬 만한 외부 자극이 가해지면, 보통 사람들이 고통을 느끼고 이에 따라 행동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얼굴을 찡그리고, 신음소리를 내고, 고통 회피 행동을 하지만, 사실 고통이라는 감각 자체는 느끼지 않는 경우를 말하죠. 나는 딱 철학적 좀비라는 개념으로 묘사할 수 있는 인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연애도 여러 번 시도했지만 도저히 마음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나를 정말 좋아해준 사람들이 몇 있었지만 길어야 두세 달, 그조차도 밀어내려는 욕구를 억누르는 기간일 뿐이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정말 오랫동안 나를 좋아해서 내가 여러 번 밀어냈는데도 부담 없이 만나서 밥 먹고 같이 술 먹고 전시 보러 돌아다니는 친구가 되자고 했습니다. 나는 연인이 아닌 사람과는 절대 섹스를 하지 않는다고 선언을 했는데도 아무렇지 않다고 해서 친구로 지내게 되었지만, 그가 내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모른 척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끝끝내 친구로서도 밀어낼 정도로 메마른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과 여전히 친구이던 어느 날, 그의 집에 놀러가 그가 해준 요리를 먹고 같이 영화를 보게 되었는데, 워쇼스키 남매의 <클라우드 아틀라스>라는 영화였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가 내게 느끼는 욕망을 굳이 쳐다보지 않아도 알 수가 있어서 끝까지 보지 못하고 나왔지만, 영화가 준 충격을 제대로 다시 경험하고 싶어서 집에 돌아가자마자 처음부터 다시 보았습니다. 등장인물들의 인연이 얽히고 섥혀 여러 생에 걸쳐 연속되고 반복되고 맺어지고 풀리는 것을 보며 러닝타임 내내 정수리에서 꼬리뼈까지, 전류가 척추를 타고 흘러내리는 듯한 감각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동안 굳게 봉인되었던 어린 시절의 그리움이라는 감정이 해방이라도 된듯 날뛰기 시작했고, 내 영혼의 남은 반쪽을 만나 미칠 것 같은 섹스를 하고 싶은 열망을 느꼈습니다. 나 역시 생애서사 연쇄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을지 모른다 생각하니 엄청난 해방감과 함께 내가 사라질 것만 같은 격렬한 물결에 휩쓸렸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생의 절벽 끄트머리에 발을 간신히 걸치고 있었는데, 강풍이 내 등을 밀어버리는 것 같은 심상이 떠올랐습니다. 



주변인의 눈에는 그때부터 나의 본격적인 미친짓이 시작되었겠지만, 내심의 눈으로 볼 때 그때 시작된 것은 인간으로서의 성장이었습니다. 학교를 안 나가기 시작했고, 대신 하루종일 술을 마시거나 대마를 피우며 그림과 예술작품들을 보러다녔습니다. 대마를 태우고 카니예 웨스트의 'All of the light' 뮤직비디오를 보았을 때에는 인생의 해답을 찾은 기분이었고, 모마의 르네 마그리트 특별전을 보러 가서는 센과 치히로 영화에 들어간 듯한 성취감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대마를 피우지 않고도 그 같은 황홀경에 들어간 듯한 감상을 선사하는 예술작품을 구상하기 시작했습니다. 마크 로스코에게 매력을 느끼기 시작한 것도 그때였고, 제임스 터렐을 싫어하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습니다. 인도의 종교적 건축물들에 심취한 것도, 20세기 중반 뉴욕의 사이키델릭 아트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습니다. 당시 뉴욕의 허드슨 강변 공원은 밤 열두 시부터 출입이 통제되고는 했는데, 벤치 뒤에 숨어 있다가 가드가 지나가면 대마를 태우며 강변을 미친 듯이 뛰어다니기도 했습니다. 한 번은 엄청난 폭우가 퍼붓는 어느 여름날 잔뜩 하이가 되어 우산도 없이 유니온 스퀘어에서 허드슨 강변까지 뛰어갔다가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찰나 찰나, 태초의 인간으로 되돌아 간 듯한 감동을 느낄수록 그렇지 못한 순간에 느끼는 낙차가 커졌고, 자살 충동도 강해졌습니다. 그래서 나는 결단을 내렸던 겁니다. 일 년만 더 살아보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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