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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 수집가 Dec 08. 2024

나의 영원한 야당, 민주당에게

나는 언제나 작은 것, 약한 것, 가여운 것에 마음을 빼앗기는 사람이었다.


생각해 보면 좀 억울하고 답답하다. 그러한 나의 본성이.


태생이 주류에 몸을 담그고 싶어 하고 크고 강하고 화려한 것들을 사랑하는 본성을 지녔었다면 내 삶은 어땠을까. '연민'다른 사람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 상대의 슬픔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감정, 을 진짜로 느껴보지 못한 사람의 삶이 궁금하기도 하다.



어린 시절 집 앞 작은 마당 잔디밭에서 잡초를 제거하시는 아빠를 돕는다 하고는 아빠가 뽑아내 버린 그 작고 가여운 잡풀들의 이름을 묻느라 정신이 없었다.

학창 시절에도 정작 나 자신은 1등을 줄곧 하는 우등생이었음에도 나를 쫓아오는 2등의 존재보다 공부는 못해도 개성 넘치던 친구들 모습이 더 기억에 남았다.

여행을 가서 루브르 박물관 전시실의 화려함에 마음을 주다가도 약탈된 문화재로 전시실을 꾸민 강대국의 논리가 떠오를 때면 온전히 몰입하기 힘들었다.

바쁜 아침 뉴스 하나를 보더라도 공영방송 KBS의 단정함보다는 투박한 MBC를 선호했다.

출근길에 로드킬을 당한 들짐승을 보면 구청 도로교통과고 환경과고 마구 전화를 돌려 동물의 마지막 존엄을 지켜주고 싶었다.


그건 내가 남보다 엄청 선량한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라기보다 어려서부터 지니고 살아온 마이너리그 근성, 반골 기질 때문일 것이다. 언제나 내 마음을 뛰게 하는 것은 다수보다 소수, 승자의 얼굴보다 패자의 뒷모습과 같은 것들이었다. 조금 아니 꽤 피곤한 삶의 태도이긴 하다.


그런 내가 내 손으로 처음 뽑은 대통령이 노무현 대통령인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타고나기를 주류보다는 비주류 체질이다. 정치를 보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인간 노무현 대통령을 잘 모르던 시절에도 잘 먹여 키운 장남 같은 얼굴을 한 한나라당 후보보다는 내놓고 키웠어도 잘 큰 넷째 자식 같은 새천년민주당 후보가 끌렸다. 그때는 내가 어떤 것을 사랑하는 사람인지 미처 깨닫지 못하던 시절이었어도 그랬다.


그러나 이제 보니 나는 언제나 여당보다는 야당을 지지하고 응원해 왔다. 어느새 바꾸고 싶은 것보다는 지키고 싶은 것이 더 많아진 나이가 됐음에도 그러하다.


기득권이 되고, 꼰대가 되고, 라떼가 되어버린 내 나이에도 나는 여전히 민주당을 바라본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지금의) 국민의힘보다는 (지금의) 민주당에 마음을 준다. 국민의힘이 판을 치던 시절 민주당 후보로 나온 사람들을 보면 그들이 꼭 소수와 약자를 사랑해서 그 당을 선택한 것만이 아님을 알면서도 평탄한 길을 두고 자갈길을 걷기로 결심한 그들의 결단에 조금 더 점수를 주고 싶었다.


사실 민주당 후보가 대통령이 된 시절도 그랬으니 여당보다 야당을 지지한다는 내 말이 맞지 않는다고 할 사람도 있겠다. 그러나,


내 마음속 민주당은 영원한 야당이다.

이것은 좋은 의미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180석을 가지고도 무얼 해야 할지 모르고, 40%가 넘는 지지율의 대통령을 지니고도 무얼 해야 할지 모르는 영원한 야당이고 영원한 (정치) 아마추어다. 그래서 아직은 더 지켜보고 기회를 주고 싶다.


현대사에서 민주당은 세 명의 대통령을 배출했지만 그 시기조차도 민주당이 여당이라는 느낌을 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에 비해 (지금의) 국민의힘은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늘 알 수 없는 우위를 차지하며 야당 시절에도 집권 여당 같은 도도함이 있었고 나는 그걸 언제나 분통하게 생각했다. 민주당은 단 한 번도 정치적 의미에서 진정한 여당이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들은 언제나 마이너였다. 그것은 180석이나 되는 국회의원 수를 가진 현재도 마찬가지다.


난 깨닫는다.


내가 투표권을 행사하는 그 어떤 날에도 나는 국민의힘을 찍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제껏 쭉 가진 자의 입장에서 경쟁과 자유를 외치는 그들에게 내 작은 힘 하나도 보태줄 수는 없다. 가장 약한 자도 두려움 없이 살아가는 시대를 위해서.


나는, 물론 당신은 배웠다.


선거는 당이 아닌 후보를, 사람이 아닌 공약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그러나 나는 나의 피붙이에게도 말할 수 있다.

선거는 후보가 아닌 당에게, 공약이 아닌 사람에게 투표해야 한다는 것을.


이것은 묻지마 투표가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정당의 색채는 분명하고, 당에는 그들이 쌓아온 삶이 녹아있다. 그에 소속된 사람들의 가치관 또한 유사하다고 보는 것이 훨씬 이성적인 판단이다.


그 당이 지향해 온 바가 자유인지 평등인지,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의 길이 그리고 지향해 온 가치가 주류의 삶을 대변하는지 비주류의 삶을 대변하는지를 보는 것은 상황에 따라 달라질지 모를 공약을 살피는 것보다 훨씬 중요함을 말이다.


부모의 정치적 그늘 속에서만 자라온 사람을, 대기업의 CEO로서 이득과 경제 논리로 무장된 사람을 뽑을 순 없었다.(안타깝게도 그들은 실제로 그 이상을 보여 주지 못했다.) 정당 정치를 하는 대한민국에서 앞으로 한동안은 민주당에서 더 대통령이 나와야 한다. 좀 더 약자를 대변하는 가치를 지닌 정당이 좀 더 집권을 해 주어야 한다. 기울어진 운동장의 수평점을 맞추기 위한 노력을 좀 더 연장하기 위해서라도 더디고 느린 거북이처럼 답답한 민주당이 좀 더 분발해 주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으로 지켜야 할 새로운 보수의 가치로 남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나는 오랜 고민의 결과를 내릴 수 있었다.




* 이 모든 고민과 글은 민주당은 지지하지만 결코 지지하지 않는 기호 1번에 대해 어떻게 투표를 해야 하는가에 대한 길고 긴 고민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고민은 드디어 명쾌한 답을 얻었습니다.

정치가 어느새 유연성을 버리고 신념의 한 부류가 되어버린 것이 안타까우면서도,

이 글이 저와 같은 처지에 있는 많은 들이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되는 글이 되었으면, 저와 다른 생각을 지닌 분께는 재고의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글은 대선을 2주 정도 앞둔 2022년의 어느 날 쓴 글이었습니다.

그때는 그래도 이러한 절망을 눈으로 확인하지 않았었기에 저렇게 차분하게 글이라도 쓸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배가 고프니 돌이라도 씹는 심정으로 썼던 글, 그러나 이제는 깨닫습니다.

그건 그저 돌이었을 뿐이라는 것을.

배도 부르지 않고 몸에도 해로울 뿐인 돌가루였음을.

문득, 그날의 다짐들이 생각나 이 글을 다시 옮겨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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