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10시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이라는 뉴스 헤드라인을 보고 만우절 거짓말처럼 현실감이 없는 기분이 들었어요.
이게 말이 되나? 어떻게 단 한 마디의 예상도 없이? 그렇게 한밤중의 첫눈처럼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날 밤 잠을 잘 이룰 수가 없더군요. 그리고 노벨상 수상에 대한 많은 이들의 글을 읽으면서 저의 감동을 차분히 정리할 수 있었어요. 잠시 잊고 있었던 문학과 문학가들에 대한 사랑과 존경, 감사와 뿌듯함이 함께한 밤이었습니다. - 그동안 노벨 문학상 수상 작품을 읽으며 느꼈던 번역본들의 장벽들이 떠올랐어요. 가장 최근에 전 아니 에르노 작품도 실패했고, 오르한 파묵과 가즈오 이시구로 등 그 전에도 무수히 실패했습니다. 노벨 문학상의 장벽도, 그것을 부추기는 번역본의 장벽도 넘지 못했어요. 그런데 무려 나의 모국어로 감상한 작품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감격스러움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가 있을까요.
결과론적인 판단이지만, 이제와 생각해 보니 국내에서 문학상 수상자가 나온다면 그것은 한강일 것이다, 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더라고요. 날아갈 듯한 시적 문장, 그래서 읽다 보면 현기증이 나고 멀미가 나는 문장, 그런데 그 문장이 갖고 있는 날개는 아마도 작가가 맨손으로 쐐기풀로 짠 피묻은 진실의 날개일 것 같아요. 어느 문장 하나도 쉽게 쓰인 것이 없으니, 읽는다는 것 자체도 얼마나 힘든 일이겠나요. 읽기도 힘든 문장들을 써내려간 한강 작가를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사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제가 읽은 국내 작가 작품 중에서 비슷한 결을 흉내라도 내고 있는 것은 천명관의 <고래>가 유일했습니다. 기존의 소설의 틀을 깨는 소설이거든요. 그러나 제게는 이 작품조차도 한참 뒤떨어지는 2등입니다.ㅎㅎ)
- 한림원에서 발표한 '역사적 트라우마를 마주하고 인간 존재의 취약성을 드러낸 강렬한 시적 산문', 내가 한강의 소설을 읽으면서 느꼈던 세 가지 지점과 정확히 맞닿아 있는 평가에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그녀가 들추어 내고 있는 5.18, 4.3 사건은 문학의 책무성이 여전히 역사적 안목에 맞닿아 있음을 보여 주고 있었고, 그러한 역사적 뒤안길을 기록해 준 작가에게 부채감과 감사함을 느끼고 있었거든요. 암요, 문학의 본질은 작고 약한 것들에 대한 애착이죠.
그리고 마흔 살 이후로 제게 늘 화두가 되고 있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모순이 취약성이라는 단어로 표현됐을 때의 전율, 그리고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 날아갈 듯한 시적 문장들...한강의 소설을 읽으면 어떤 정보가 읽혀지기보다는 이미지와 감정이 생성됩니다. 그의 문장이 시적 산문이라는 한림원의 평가는 그래서 더욱 독자로서 느낄 수 있는감동이 있었습니다. 같은 인간의 언어로 어떻게 그렇게 가볍고도 묵직하게 짚어낼 수가 있었을까요.
- 문과로 살아왔던 나날들, 언어 전공자의 서러움에 대한 보상감도 깔려 있었지요. 무식하고 못 배워먹은 대통령이 우리말을 뭣하러 더 배우냐고 했죠. 저는 특목고(과학고)에서 근무하면서 수학, 과학 전공샘들과 학생들로부터 무수한 의혹(!)의 눈길을 받으며 근무했었습니다.
선생님, 국어 뭣하러 배워요? 솔직히 과학고 다니는 애들한테 국어 많이 가르쳐서 뭐 합니까? 선생님, 국어는 무엇으로 논문을 쓰나요? 문학은 애매하고 자의적이에요 등등...
그러나 결국 문화와 예술이 내 나라 한국의 커다란 정체성이구나. 내가 제대로 항변하지 못했던 많은 것들이 한국 문인들에 의해 문학에 쌓이고 쌓여 노벨문학상 수상이라는 쾌거를 이루었구나.
어떤 웃긴 글에서 읽었어요. 그 수많은 한국근현대 단편 소설, 얼마나 재미있는지 아냐고. 문학가가 됐어야 했을 그 많은 글쟁이들이 지금은 다 댓글러로 달려가 댓글이 이렇게 재밌다고요. 왜 엄청 웃기고 위트있는 댓글들, 풍자와 해학의 글들 기사에 많이 달리잖아요. 그런데 한강 소설이 불호다, 라는 글들은 조금 많이 아쉬워요. 그 마음 속에는 '나도 노벨상 수상 작가의 작품 좀 읽었다. 나 문학 좀 읽는 사람이거든. 그런데 독자로서의 나를 설득하지 못했다. 그럼 별로인 거 아닌가?' 하는 오해와 자만이 섞여 있다고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금미의 소설이 더 재미있어요. 아시죠? 그러나 재미나 보편적 수용성으로 노벨상을 주진 않아요. 바꿔 말해서, 불호보다 호가 더 많은 소설이 과연 소설의 역할을 다 해낸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지금 서점으로 달려서 한강의 소설을 산다는 대중들의 모습, 많은 대다수가 소설을 읽고 느낄 당혹감을 떠올리면 조금 걱정이 됩니다. 이게 뭐야 하면서 입댈 사람들이 너무 많을 것 같아요. 노벨문학상으로 이슈가 되어 자칫 호불호의 잣대가 작가에게 드리워지는 것은 아닐까 싶어서요.
과학과 예술을 동일선상에서 두고 비교하는 건 좀 무리스럽기는 하지만 우리가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사람들의 연구물을 보고 이해가 된다거나, 필요성을 느낀다거나, 난 그 연구 결과를 좋아하지 않아 와 같이 반응하지 않잖아요. 누구나 읽는 게 소설이다 보니 문학은 대중성을 전제로 하지만, 그 때문에 받아야 하는 숱한 저평가와 오해들을 감내해야 하는 것 같아요. 한강 작가가 이러한 왕관의 무게를 견디기를 바랄 뿐입니다.
학생들이 한번 질문한 적 있어요.
- 선생님 왜 소설 주인공들은 정상적인 사람들이 하나도 없어요?
소설가들은 정상적인 삶에 관심이 없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뒤틀린 욕망을 갖고 살아가는가, 그리고 그 선택은 얼마나 모순적인가, 그를 통해 바라보는 인간의 본성은 어떠한가를 탐구하는 것이 소설가들의 관심사이고 책무성이거든요. 불륜, 패륜, 거짓, 위선, 전쟁 등을 다루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고, 선택하고, 사라지는 인간에 대한 탐구가 소설가들의 역할이겠지요.
다시 한번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축하하며,
우리 언어로 노벨문학상 수상 작품을 읽을 수 있는 기쁜 과제를 선사해준 작가님에게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