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양원에서 선임 요양보호사들이 신참들에게 늘 강조하는 것 중의 하나가 어르신들 약에 대한 당부다.
대부분의 어르신들이 고혈압이나 당뇨 등의 각종 기저질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루에 두세 차례 식후 및 취침 전에 약을 복용한다.
밥맛이 없다고 투정을 부리며 식사를 안 하려는 어르신들도 웬일인지 당신의 약만큼은 잊지 않고 꼭 챙겨 먹으려는 습성이 있다. 방금 전에 먹은 약을 기억 못 하고 약을 먹었냐고 계속 묻거나 안 먹었다고 고집을 부려서 약봉지를 버리지 않고 확인시키는 경우도 적지 않다.
놀랍게도 치매의 경중을 떠나 어르신들이 약만큼은 본능적으로 먼저 챙기려는 경향이 짙다.
어르신들이 날마다 먹는 약의 종류는 많고도 다양하다. 한 주먹이나 되는 약을 몇 번에 나눠서 매번 삼키는 것도 그들에게는 고통스러운 일이다. 보통은 잘게 부숴서 숟가락에 타 드리거나 달달한 음료수에 섞어 드리기도 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약봉지에 쓰여있는 이름을 하나하나 정확하게 확인하는 일이다. 선임 요양보호사들은 어르신들 약이 바뀌어서 난리가 나는 일이 드물지 않으므로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매번 강조한다.
그러나 평소에 한 점 실수 없이 일을 하다가도 잠시 긴장의 끈을 놓는 그 짧은 순간, 사고는 일어나게 마련이다. 그동안 꽁꽁 숨기고 있다가 이제야 말하지만 ‘나에게 실수란 없다’고 자부했던 내게도 쉽게 털어놓을 수 없었던 한 번의 사고가 있었다.
지난 여름, 여자 어르신만 있는 8층에서 근무할 때였다. 802호실에 있는 이영숙(가명) 어르신은 약한 치매 증상이 있었지만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고 스스로 이동이 가능한 분이었다. 당뇨가 있어도 빵을 유난히 좋아해서 제과점을 운영하는 딸들이 올 때면 언제나 요양보호사들 몫까지 빵을 한가득 들고 와 나눠 먹는 것을 즐겼다.
남들과 말 섞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그녀는 거실에 나와서 함께 밥 먹는 것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저 혼자서 조용히 TV를 보거나 운동 삼아 복도를 몇 차례 걷는 게 그녀의 낙이었다.
그녀는 약 챙겨 먹는 것에 유독 민감했는데, 특히 취침 약을 다른 어르신들처럼 정해진 시간에 먹지 않고 꼭 1시간 뒤에 따로 챙겨 달라고 요구했다. 그래서 그녀의 약은 항상 마지막에 혼자 남겨진 상태로 약상자 안에 있기 마련이었다.
사고가 있던 그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문제는 그녀의 약만 한 봉지 있어야 할 약상자 안에 하필 803호 김연홍(가명) 어르신의 약이 함께 남아 있었다는 데 있었다. 약을 이미 먹었다면서 웬일인지 취침 약 먹기를 거부한 김연홍 어르신 약을 동료 요양보호사가 말도 없이 그 위에 올려둔 것이었다. 시간이 되자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위에 놓인 약봉지를 들고 이영숙 어르신 방에 가서 그녀를 일으켜 세우고는 바로 먹기 좋게 봉지를 뜯었다. 전날까지만 해도 늘 약봉지에 쓰인 이름을 한 번 확인하고 드렸었는데 이날만큼은 뭔가에 홀린 듯 그러지 않았던 것이다.
“이거 약이 평소 하고 다른 것 같은데?”
한 번 확인할 기회가 이렇게 그녀를 통해 있었음에도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어르신, 오늘 처방전이 달라져서 그런가 봐요. 맞겠죠, 뭐. 어서 드세요”
“그래, 그럴 수도 있겠네. 알았어”
그렇게 그녀가 재빨리 약을 입에 털어 넣는 짧은 순간, 갑자기 뒷덜미가 싸해지는 느낌이 왔다. 얼른 쓰레기통에 던져버린 약봉지를 주워 쓰인 이름을 확인해보니 ‘이영숙’이 아니라 ‘김연홍’이 또렷이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약을 삼킨 뒤였다.
‘허걱......’
‘어떡하지? 약이 바뀌었잖아... 망.했.다’
졸지에 번개 맞은 사람처럼 온몸에 강한 전류가 흐르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할 수가 없었다. 셀 수도 없는 수만 가지 생각이 온통 머리를 헤집고 돌아다녔다. 무서웠다. 뒷감당을 어떻게 해야 하나 망연자실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거실로 나와 약상자를 보니 그녀의 약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게 보였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마침 선임 요양보호사가 다가오더니 흙빛으로 변한 내 얼굴을 보고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했는지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다. 나는 더듬거리며 사실대로 말했다. 그런데 망설임도 없이 뜻밖의 대답이 날아왔다.
“우와~ 알고 보니 선생님도 사람이었네요, 이런 실수를 다 하고...하하핫”
“네? 무슨 말씀인지...”
“그동안 기계인 줄 알았지 뭐예요.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처럼 어찌나 꼼꼼하게 일을 하던지... 하하핫”
“아, 제가요? 그랬나요...하하...하”
“아무튼 큰 실수이긴 한데, 그래도 다행인 것 같아요. 김연홍 어르신 약은 다른 게 없고 그냥 신경 안정제하고 약간의 수면제만 있는 거라서 다른 어르신이 드셔도 별문제는 없을 거예요, 너무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잘못은 잘못이죠. 특수 질환이 있는 다른 어르신 약하고 바뀌었다면 우리로서는 성분을 세세히 알 수 없으니 큰일 날 수도 있다고요.”
“무조건 죄송합니다. 몇 번씩 확인해야 한다고 그토록 당부하셨었는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내가 간호팀에 물어볼게요. 내가 실수로 잘못 드렸다고 하지 뭐. 잔소리는 내가 들을 테니 선생님은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마세요.”
선임 요양보호사 덕에 조금 마음이 안정되기는 했지만, 잠시 몇 시간 눈 붙일 수 있는 휴식 시간에도 도통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어르신이 정말 밤새 괜찮을지,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촉각을 기울이다가 결국 그녀의 방에 가서 곤히 잠든 그녀를 내내 지켜보기로 했다. 평소 불면증에 시달렸던 그녀는 웬일인지 달고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다음 날 아침, 그녀는 유난히 개운한 얼굴로 깨어났다. 그리고 사고 탓에 전날 취침 약을 먹지 못한 김연홍 어르신도 평소와 다름없이 거뜬하게 잘 자고 일어났다. 그때서야 나도 온몸이 가라앉을 듯한 긴 한숨과 함께 밤새도록 애태우며 졸였던 마음을 편안하게 내려놓을 수 있었다. 잠깐의 실수로 빚어진 일이었지만 내게는 악몽과도 같은 길고도 긴 시간이었다.
그 사건 이후로 나는 어떤 경우에도 약봉지 확인만큼은 철저히 하고 또 했다. 그리고 선임 요양보호사에게 한편으로는 몹시 부끄러웠지만 진심으로 고마웠다.
요양원에서는 신입인 동료 요양보호사에게 책임을 전가하거나 나무라기 전에 감싸고 배려할 줄 아는 선임을 만난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인 것을 안다. 편견이나 선입견일 수도 있지만, 인생 경험이 다양한, 나이 많은 여자들이 모인 곳이라 상상 이상으로 말도 많고 탈도 많다는 얘길 이미 충분히 들었던 탓이다. 하지만 인덕이 있었는지 내가 만난 선임들은 하나같이 좋은 분들이었다. 잔소리하기보다는 칭찬을 먼저 했고, 나에게 힘든 일을 시키기 전에 자신들이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육체노동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인 걸 알고 그랬다고 해서 더 감동을 주었다.
그런데 사실은 ‘기계인 줄 알았다’는 선임의 말이 내게는 두고두고 충격이었다. 웃자고 한 말이었다지만 ‘인간미’가 모자라 보였다는 것 같아 스스로 찔렸는지, 오래도록 그 말이 뇌리에 맴돌며 지워지지 않았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