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량 Oct 26. 2023

후일담

<집이라는 한 글자> 시즌1의 마무리

계절이 바뀌었다. 몇몇 일들이 있었다.


우리집 매매 이후 같은 평수의 거래는 한 건 더 있었다. 층은 우리보다 높고 매매금액은 적었다. 여기저기 집을 보러 다니는 분위기도 조금 줄어든 것 같았다. 호가는 높은 채 유지되고 있으나 추격매매는 없다는 기사를 보았다. 한국의 기준 금리는 동결되었으나 가산 금리는 촘촘히 붙는 추세기도 했다. 분쟁을 비롯한 사건 사고들이 일어나고 주식 시장은 출렁였다. 곳곳에 빈대가 출몰한다는 뉴스에 나는 두고 온 옛사랑, 에어비앤비를 걱정하기도 했다. 괜찮나요, 호스트들.


여전히 바르셀로나 부동산 플랫폼의 메일링 서비스를 받고 있다. 설정해 놓은 조건에 맞는 매물이 뜨면 자동으로 도착하는 메일이다. 여기의 오후, 그곳의 아침 시간이면 메일 도착 알림이 뜬다. 아, 출근들 하셨나 보군. 까페 꼰 레체를 홀짝이며 새로운 매물 정보를 올리고 있으려나. 사진으로 나는 그곳의 계절을 알아차린다. 마음에 드는 집엔 하트를 찍어둔다. 집 구경, 동네 구경은 언제나 좋다.


매일 닦고 쓸던 일은 이젠 좀 느슨해졌다. 어제는 오랜만에 화장실 수전을 닦았다. 티 없이 반들거리는 수전을 보며 그때의 열정에 대해 생각했다. 호스트일 때도, 매도 희망자일 때도 그랬지. 수전을 잘 닦고 물기를 훔치는 것만으로도 집의 이미지가 달라진다고. 물때, 손때, 먼지와 머리카락. 여기 사람이 살고 있다는 착실한 증거들. 화장실 문 앞에 서서 안을 휘 둘러본다. 슬리퍼는 가지런히, 변기 뚜껑은 닫아둔다. 거울엔 얼룩 하나 없고 선반 위는 말끔하다. (물론 거울장은 열어보지 말아야 한다) 욕실 바닥은 바삭하니 말라있다. 그런 사소함에 열중했었다.


집 보러 오는 손님이 도착할 무렵엔 늘 보사노바를 틀어두었다. 클래식은 좀 본격적인 느낌이고 가요나 팝은 취향을 타니까. 있는 듯 없는 듯하나 은은한 배경으로 존재하는 보사노바가 제격이었다. 꼬마가 '미술관 까페에서 나오는 음악'이라 칭하는 플레이리스트들과 함께 손님을 맞았다. 아스트루드 질베르또, 주앙 질베르또, 까를로스 조빔이 팔아준 우리집. 허나 매도 다음 날엔 보사노바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출근길, 나는 썬루프를 열고 퀸을 들었다. 위윌위윌 락유에 맞춰 핸들을 두드리고 위아 더 챔피언을 따라 불렀다. 클래식의 격정도 좋고 보사노바의 감성도 좋으나 역시 성취감엔 락이구나 생각했다. 락 윌 네버다이니까.


매수자에게 받은 중도금은 마이너스 통장에서 고이 잠들어 있다가 우리가 계약한 매물의 중도금으로 고스란히 사라졌다. 찰나의 플러스였다.


조카의 돌반지를 사러 꼬마와 종로 5가를 찾았다. 선물용으론 1돈짜리 반지를 사고 꼬마를 위해선 다이소에 들린다. 반짝이가 잔뜩 붙은 반지 10개 세트가 무려 삼천 원. 그걸 소중히 안고 종로를 거닌다. 꼬마는 종로 5가의 휘황찬란함에 적잖이 감명받은 모양이었다. 암, 종로엔 구경할 게 참 많지. 종묘 공원에선 할아버지들이 바둑 두는 것도 본다. 형아는 흰 돌, 동생은 검은 돌이야. 나는 고작 그런 말을 해주다 깨닫는다. 아빠가 나와 동생에게 바둑을 가르쳐줄 때 이런 비슷한 말을 했었다고. 체스를 배울 때도 장기를 배울 때도. 딱 소리나게 말을 내려놓으며 다음 수, 다다음 수를 헤아리던 때가 생각났다. 체크메이트! 혹은 장군이요! 크게 외치며 동생의 약을 올리던 일도.


시청에서 시작해 덕수궁을 돌고 정동길을 지나 광화문으로 향한 날엔 나른한 피곤함이 몰려왔다. 월대를 복원했다는데 봐야 하지 않겠어? 새단장한 광화문은 눈에 가릴 것 없이 드넓었다. 꼬마는 북악을 가리키며 '높은 산!' 이라고 외쳤다. 가을 하늘 아래 높은 산, 그리고 궁을 보니 더 아름다운 풍경이 있을까 싶었다. 의정부 터는 언제 복원을 마치려나. 미 대사관은 언제 옮기지. 그럼 그곳엔 무엇이 생기려나. 그리고 우리집은 언제 지어질까. 강산의 흐름과 재개발의 속도, 무엇이 빠르고 느린지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하니 호기를 부렸겠지만.


오늘은 주민센터에 가서 인감증명서를 뽑았다. 대출을 받기 위해 구비해야 할 서류들 중 하나였다. 사망자의 인감증명을 뗄 경우 형사처벌 당할 수 있습니다. 주민센터의 창구엔 이런 안내가 쓰여있었다. 그래서 온라인 발급도 안 되는 모양이었다. 받아 든 증명서의 은색 무궁화 위로 내 이름 석 자가 선명하다. 이 도장으로 여러 계약서들을 지나왔다. 두툼하고 묵직한, 승천하는 용이라도 양각된 그런 도장이 아니다. 그냥 평범한 막도장. 급히 필요할 때 구청 앞 도장가게에서 제일 싼 걸로 해주세요, 할 법한 도장. 오래도록 서랍에서 구르다 어느 날 인감이 되고만 도장. 문득 바르셀로나에서도 이 도장이 통할까 궁금해졌다.





매거진의 이전글 한여름의 독서생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