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량 Nov 09. 2023

불안이 두려워 성실해지는 J

집이라는 한 글자 (22)

돌잡이 때 꼬마는 마패를 잡았다. 마패가 지닌 의미는 고위공무원이라 했다. 이왕이면 고위공무원보다 여러 번 말을 갈아타며 자유롭게 사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게 내가 바라는 삶이기도 하니까. 그래서 그런 걸까. 꼬마가 좋아하는 놀이엔 짐 싸기가 있다. 바퀴 달린 캐리어든 어린이집 가방이든 굴러다니는 비닐봉지든 상관없다. 거기에 자기가 좋아하는 물건들을 담고 어디론가 다녀오는 시늉을 한다. 처음엔 손에 잡히는 대로 다 쑤셔 넣더니 이젠 제법 줄거리를 만들어 낸다. 팬티와 양말을 담고 여행길에 오르고, 장난감 야채와 과일모형을 담아 장 봐오는 흉내도 낸다. 캐리어의 지퍼가 잘 닫히지 않으면 주저앉아 역정을 내기도 하는데 그걸 볼 때면 등골이 서늘하다. 너무도 나 같아서.


짐 싸기는 잘하는데 아직 풀기는 못해서 정작 신어야 할 양말을 못 찾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꼬마가 한눈 판 틈에 몰래몰래 가방을 뒤져 물건들을 돌려놓곤 한다. 제가 싸놓은 가방을 해체하는 걸 보기라도 하면 서운함 묻은 목소리가 끼어든다. '엄마 정리하지 마, 내 소중한 물건인데.' 처음엔 꼬마가 '소중하다'라는 형용사를 사용하는 것에 놀라 감탄했지만, 이젠 하던 일을 마저 하며 대답한다. '응, 그래. 근데 그럼 내일 무슨 양말 신고 갈래? 신을 게 아무것도 없잖아.' 사실 이건 적절하지 못한 응대다. '그럼 나 내일 양말 안 신고 갈래'에서 출발하는 각종 행패와 맞닥뜨린다. '나 떼 부릴 거야!' 하고 울먹거릴라치면 그게 또 귀엽다. 그렇게 엄포를 놓을 수 있는 때가 좋은 거니까. 나도 힘들면 어딘가 떼 부리겠다고 협박할 수 있으면 좋겠다 싶고.


꼬마처럼 나도 짐 꾸리기를 좋아한다. 물리적으로 짐 꾸리는 행위도 좋지만 이를 포함한 행위, 여행을 기획하고 계획을 수립하는 과정 전체를 좋아한다. 촘촘하면서도 느슨한 플래너(모순된 말이지만 나름의 합당한 기준이 있다)를 바라볼 때 설레고 뿌듯했다. 혹시 이것도 유전일까? 생각해 보니 엄마 역시 그랬다. 엄마는 늘 메모지와 펜을 가까이 두고 살았다. 여름휴가를 위한 짐을 꾸릴 때도, 장을 보러 갈 때도 체크리스트를 만들곤 했다. 유선 전화를 쓰던 시절엔 통화를 하면서도 꼼꼼한 메모를 남겼다. 해야 할 일을 쓰고 그걸 차분히 지워나가는 일. 거기엔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 꼬인 일들을 깔끔하게 매듭짓는 완결성, 그래서 상황을 순조로이 마무리했다는 안정감이 있었다. 나는 그 감각을 아주 잘 안다.


그건 엄마와 내가 불안도가 높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예민하고 민감하여 상황을 예측하고 통제하고 싶어하는 성향. 우리는 꼭 닮았다. 낯선 상황에 놓이면 당황하기에 미리 준비하고 예습할 수밖에 없다. 이와 반대로 불안정하고 낯선 상황에 달려들고 싶은 욕망도 있다. 나를 마구 놓아버리고 싶은 마음. 그러나 그것 역시 선택지 안에 있어야 안심하는 편이다. 예를 들어 여행을 준비하며 매일의 계획을 치밀하게 세우지는 않는다. 하지만 선택지들은 충분히 숙지하고 있다. a. 미술관 방문 b. 맛집 탐방 c. 산책하기 d. 숙소에서 빈둥거리기 e. 늦은 밤까지 흥청망청 놀기 등의 카드패를 늘어놓고 그때의 기분과 상황에 맞게 고르는 것, 그게 내 여행 방식이었다. 쓰다 보니 너무도 명확한 J 같다. 불안이 두려워 성실해지는 J.


그런 J에게 크나큰 미션이 닥쳤다. 그건 바로 이사다.


부동산에 집을 내어놓고 손님들을 맞는 시기에 우리집은 잠깐 반짝거렸다. 사람이 살긴 살되 어쩐지 모델하우스 같은 집을 만들고자 늘 바빴다. 수납공간이 많은 게 장점이라고 어필했지만 모조리 열어 보일 수는 없었다(샘플로 열어보일 칸은 미리 정돈해 두었다). 무리해서 장을 여닫다 대강대강 쑤셔 박은 짐이 쏟아져 마루가 패인 적도 있다. 마루와 비슷한 색의 색연필을 좌르르 늘어놓고 흔적을 메꾸느라 고심했다. 패인 면을 채우고 나무목의 무늬까지 따라 그렸다. 마지막으로 은은하게 명암을 넣으니 꽤 그럴싸했다.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 자국은 뭐죠?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다. 운 좋게 거래를 마치고서 집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야말로 사람 사는 냄새 물씬 난다고나 할까. 이제야말로 진짜 비우고 치워야 하는 때가 도래했거늘.


이삿짐 센터에서는 있는 그대로 옮겨준다고 하나 그래서 버릴 것을 먼저 챙겨야 한다. 제일 먼저 필요한 건 쓰레기봉투다. 이왕이면 넉넉한 사이즈로, 많으면 많을수록 안심이다. 그렇게 버릴 것들을 추려내야 할 텐데 시작하기가 쉽지 않다. 퇴근하고 오면 기진맥진한 상태고, 주말엔 주말대로 여러 일정들에 바쁘다. 그래서 대강 상상해 본다. 여기선 이걸 버려야 하고, 저기선 저걸 버려야 하고. 음식물은 유통기한과 밀봉여부를 따져봐야 할 테고, 수납박스 속 오래된 물건들도 한번 열어 솎아낼 필요가 있다. 아쉬운 것은 오래 가꾸어온 식물들이다. 몇 번의 이사에도 얌전히 따라와 잘 적응하며 자라준 식물들. 부엌, 책장, 거실과 베란다. 눈 닿는 곳마다 푸릇푸릇한 식물들이 놓여있지만 이 모두를 두고 가야 한다.

해외이삿짐에 식물은 데려갈 수 없으니까.

겨울의 끝자락,  우리는 독일로 떠난다.



매거진의 이전글 후일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