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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량 Nov 15. 2023

개가 짖어도 배는 뜬다고

집이라는 한 글자 (23)

한때 달과 나는 일로부터 탈출하고자 기진맥진 애를 썼다. 이것이 우리를 잡아먹으려는 것 같아서, 사는 보람을 느낄 수 없어서, 자꾸만 나를 잃어버리는 것 같아서. 그건 우리가 비교적 이른 시기에 일을 시작했기 때문일까. 나는 한국나이 스물다섯, 그러니 만으로는 스물셋. 달은 군복무를 마친 후 스물여덟, 만으로 스물여섯에 취업을 했다. 소속과 직책 그리고 월급이 생긴다는 기쁨도 잠시 우리는 꾸준히 방황했다. 사춘기도 제때 겪어야 복이라는데. 끊임없이 머리를 들이받는 유리벽 속 새처럼 계속 푸드덕거렸다. 인사관리자의 파일 속의 달과 나에겐 어떤 낙인이나 표지가 찍혀있었는지 모른다. 관찰 혹은 관심을 요구하는 개체로. 붉은 도장이 쾅.


장녀와 장남의 숙명이랄까. 벽을 차마 깨뜨릴 수 없던 우린 일찌감치 각자도생의 길을 걷는다. 달은 달의 방식대로, 나는 나의 방식대로. 나는 내 안에서 요동치는 자아를 둘로 쪼갰다. 처음엔 쪼갠 부분이 거칠어 서로를 견제하고 폄훼했으나 한참의 시일이 지난 지금, 모서리는 부드럽게 마모되었다. 나는 직장에서의 나와, 개인으로서의 나를 우아하게 분리할 수 있다. 여기에 한 가지 중대한 과업, 엄마라는 자아를 얻게 된 이후 새로운 분열에 신음하고 있긴 하지만. 그 모든 시간을 압축하자면 역시 이 말이 최선이다. 우여곡절.


우여곡절 끝에 달은 퇴사도 이직도 휴직도 아니하고 주재원으로 선발되었다. 그 기나긴 소회를 어찌 말로 다할 수 있으랴. 거론되는 후보지는 여럿이었다. 멕시코, 캐나다, 인도, 호주, 미국, 그리고 독일. 사실 나는 그곳이 어디든 좋았다. 이국의 도시를 생각하면 마음 속 불씨가 지펴지는 느낌이었다. 영원한 수족냉증 보유자로서 따뜻한 나라라면 더 좋겠다 싶었다. 멕시코, 인도, 호주, 그리고 미국의 마이애미. 달은 치안이나 물가 그리고 의료시설(코로나!) 접근성 등 여러가지를 고려했으나 나는 품 안의 아기를 어르며 따스한 상상에 빠져들었다. 타코, 커리, 커피, 음. 마이애미는 그 모두를 가지고 있지 않겠어? 백일 남짓된 아기는 축축하고 묵직했으나 머릿속에선 야자수가 일렁였다. 그 상상에서 나는 이미 세 번째 마가리타를 주문하고 있었다.


그러나 복병이 있었다. 마이애미는 직항이 없다. 중남미 문화권이라 아시안 인프라도 드물다. 그야말로 소수인종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이야기다. 꼬마가 없었다면 그게 더 모험처럼 느껴졌겠으나, 이제는 이야기가 다르다. 꼬마는 교육기관에 가야하고(기필코 반드시!) 성장과정에 맞춰 양질의 식사를 제공받아야 한다. 마이애미에 간다면 우리는 때때로 귀한 보물을 찾아 먼 길을 떠나야 할 것이다. 마침내 당도한 어느 섹션, 불닭볶음면과 마른미역, 멸치액젓과 냉동김밥 사이에서 나는 소설을 되새길지도 모른다. 그건 당연히 <H마트에서 울다>. 부여잡은 마른미역이 모두 불 정도로 엉엉 울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독일로 마음을 옮긴다. 내 안의 숨은 나는 조용히 쾌재를 부른다. 스페인어 문화권에서 사는 것과 스페인이 가까운 것이라면 역시 후자가 좋다고. 바르셀로나까지의 비행시간을 헤아려보다 내친김에 자차 이동 시간도 검색해 본다. 열세 시간. 친절한 구글맵은 걸어서 갈 경우 걸리는 시간도 알려준다. 12일. 세상에나, 나만의 까미노도 만들 수 있겠네. 과연 육로로 어디든 갈 수 있는 곳이로구나. 사실상 섬에 살고 있는 서울사람으로서 이 상상의 나래는 즐겁다. 물론, 실제 걷지 않고 마우스만 휙휙 움직여하는 여행이라 더욱 즐겁다. 배낭 없이, 발가락 물집 없이. 안아달라고 애걸복걸하는 꼬마 없이. 세 번째 맥주를 주문하는 나를 상상하며. Salut! 아니 아니, Prost!


여기까지가 막연한 단계에서의 구상이었다면, 이젠 슬슬 발등에 불이 떨어지고 있다. 출국에 앞서 컨테이너로 이삿짐을 먼저 보내야 한다. 호기롭게 연 스프레드시트의 열은 끝도 없이 길어진다. 다 싸서 보내면 마냥 걱정 없을 텐데, 떠나기 전 써야 할 살림살이들도 적당히 남겨놓아야 하니까 셈이 복잡하다. 마침 계절은 겨울. 옷도 이불도 짐도 무거운 계절. 먹고살기 위한 필수 아이템들은 왜 이리 자잘하고 다양한지. 숟가락과 젓가락 재고를 파악해 몇 개를 보내고 몇 개를 남길 것인지부터, 중고로 사들여 5년을 쓴 냉장고를 가져갈 것인지 새로 살 것인지, 새로 산다면 거기에서 살 것인지 여기서 사서 부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줄을 잇는다.


그러다가도 자꾸만 튀어나오는 잡동사니들, 예를 들어 지난날의 cd와 dvd들, 친구들이 준 편지, 글을 기고한 모든 페이퍼들 앞에서 무릎을 다소곳이 꿇고 추억 속에 빠져든다. 이사는 2주도 남지 않았는데. 당연히 독일의 집도 구하지 못했는데. 인천항에서 떠난 배가 함부르크에 도달하기까지, 그리고 프랑크푸르트에 배송되기까지 뭐 어떻게든 되어있겠지. 스프레드시트를 열었다 닫고, 붙박이장 구석구석을 털고, 새로 구매할 물건들의 배송 일정을 체크하느라 눈이 빠지면서도 느닷없이 지난 추억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그렇게 살고 있다. 그야말로 케 세라 세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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