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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량 Feb 20. 2024

커피와 맥주 사이 반미

나트랑 식도락 일지

한적한 길을 지나 이윽고 시내가 가까워졌다. 건물과 사람들의 밀도가, 그리고 빵빵빵 클락션의 빈도도 늘어났다. 웬만한 길은 차선의 구분이 없어 서로 눈치껏 비껴가는 모양이었다. 그건 보행자도 예외가 아니었다. 차창 오른편으론 진한 푸른색의 바다와 곱게 다듬은 가로수들이 보였다. 희게 이는 파도와 색색의 패러세일링도. 강원도 같다! 속초, 강릉, 양양 등 도시 이름을 주워넘기다가도 어! 드디어 신호등 발견! 하면 모두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히 드물고 귀한 신호등이었다.

이어 도착한 곳은 베트남 가정식 레스토랑이었다. 인원이 많아 조금 기다려야 하나 싶었는데, 금세 자리가 났다. 메뉴판 위로 머리를 맞대고 잠시 고심했지만 결론은 많이, 왕창 시키자. 그리고 맥주도! 평소 묵직한 흑맥주를 좋아하지만(이제껏 마신 기네스 값이면 더블린행 왕복 일등석도 타고 남았을 거라 자신한다) 역시 여름나라에선 청량한 라거지. 컵 가득 담아준 얼음을 보니 동남아 여행이 실감난다. 모두들 비어온더락으로 첫 잔을 부딪친다. 꿀꺽 시원하게 넘어가는 맥주와 짭조름하고 새콤달콤한 베트남 음식들. 비록 외국인-거의 한국인-들로 가득 찬 식당이었지만 그래서 더 입에 착 달라붙었달까. 고수를 먹을 수 없는 이와 먹고도 더 주세요 하는 이들로 양분되는 우리 입맛도 흥미로웠다. 그게 유전자 어디에 새겨져 있다는데 거 참 신기하지.


계란 입힌 부침개 같았던 반쎄오, 라이스페이퍼 돌돌 말아 튀긴 짜조, 그리고 모닝글로리 볶음과 파인애플 볶음밥. 거기에 무슨 무슨 볶음들과 튀김들이 어우러졌는데 세세히 기억할 수 없을 만큼 즐겁게 욱여넣었다. 우리는 짜조와 모닝글로리를 더 추가해 배를 불렸다. 나는 밥대신 요리들만 격파했는데, 마치 반찬만 공략하는 외국인이 된 느낌이었다. 부페에서 잡채를 메인 요리 삼는 그런 사람. 베트남요리는 해산물, 채소, 고기, 과일에 이르는 재료 라인업이 풍성하고, 거기에 특색 있는 향신료로 변주를 주는 듯 보였다. 친구들은 샐러드 속 낯선 풀들도 먹어보았고, 금세 얼굴을 찡그렸다. 누가 말했다. 이거 아까 마사지샵 족욕할 때 들어있던 풀 아냐?

조식 맛이 없다는 평을 읽고 기대 없이 약간의 의무감으로 들린 조식 부페에서도 나는 적잖이 황홀해했다. 훑어보다 끌리는 몇 개를 골라 집중적으로 공략했는데, 3개 이상 먹은 것을 꼽자면 이렇다. 베트남식 연유커피, 반미, 요거트. 먼저 연유커피. 커피잔 가득 얼음을 담는다. 베트남식 밀크커피라고 쓰인 주전자로 약간은 걸쭉해 보이는 커피를 붓는다. 색은 검은색에 가까운 고동색. 거기에 연유를 듬뿍 붓는다. 달그락거리며 녹는 얼음 사이로 한 입 들이켜는 순간 몸에서 즉각적인 반응이 일어난다. 카페인과 당이 혈관에 퍼지며 뇌에 신호를 보낸다. 무엇이든 할 수 있어! 그야말로 호랑이 기운이 샘솟았다. 그 느낌은 아주 신선했다. <헤어질 결심>의 대사도 떠올랐다. '우연히 만났을 때 다시 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죠?'


그런 내가 위험해 보였는지 친구들은 우유를 타 먹길 권했고, 아까의 커피에 우유를 섞으니 좀 더 사회화된 기운이 솟아났다. 혁명이라도 일으킬 기세였는데 이젠 캠페인 정도에 만족할 느낌. 그걸 매일 아침 3잔씩 꼭꼭 먹었다. 귀한 비법으로 달인 보약처럼. 다음으로 반미를 집어든다. 조식 부페의 반미는 일반적인 반미보다 간단한 것으로, 하드롤처럼 작은 바게트에 오이, 당근, 고수, 양파와 얇게 썬 햄이 들었다. 소스도 별다르지 않은 느낌인데 어찌나 맛이 있는지. 부드러운 바게트라지만 바게트는 바게트다. 입 안 경구개가 너덜거리기 시작함을 감지하면서도 멈출 수 없다. 거기에 요거트를 끼얹는다. 가당이든 무가당이든, 플레인이든 과일이든 다 좋다. h가 먹는 걸 보고 요거트 위에 패션푸르트를 올려 함께 음미한다. 너무 좋다! 최고야!

커피와 반미 탐구는 호텔 밖에서도 이어졌다. 커피 끊었다가 오길 참으로 잘했구나. 달고 진한 커피는 에너지 충전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반미는 왜 먹어도 먹어도 좋은지, 빵은 바삭촉촉, 고수는 향긋하고 풍성한 재료들은 한데 잘 어우러졌다. 한국 가서도 먹을 수 있겠다만 역시 이곳에서 먹는 것만 못하겠지. 그런 마음으로 출국장 입장 직전까지 반미를 물어뜯었다. 동봉된 매콤한 소스를 뿌려먹으면 더 맛있다는 말에 작은 비닐봉지를 꾹꾹 누르던 h는 그만 봉지를 터뜨리기도 했다. 맛있게 먹고 말겠노란 무서운 집념이었다. 옷에 튄 소스를 닦느라 분주한 광경을 보며 나는 마지막 사이공 맥주를 들이켰다. 그리고 물었다. 너 반미 남길 거면 나 먹어도 돼?

우리 중 유난히 민감하고 예민한 장을 가진 이도 있었거늘, 탈이 나지 않은 걸 보면 이곳 음식이 우리에게 잘 맞는 듯했다. 비어사이공, 타이거, 비어비비나. 어떤 맥주든 시키면 컵엔 얼음이, 어떨 땐 커다란 바께쓰에 담겨 나오기도 했다. 어떤 물로 얼마동안 얼려 어디에 보관했다가 여기 바께쓰에 담겨 오게 된 지 모를 그 얼음을 맥주에 연거푸 띄워먹으면서도 모두의 장은 무사했다. 무사해 탈이었다. 아침만 빼고 간식이든 식사든 언제나 얼음 동동 띄운 맥주를 시켜댔다. 노상의 음식점에서도, 오늘은 힘 좀 주련다 하고 간 비싼 레스토랑에서도, 배달어플로도 시켰다. 넉넉히 주문했다고 여겼는데 금세 떨어져 새벽녘 룸서비스로도 시킨다. 나는 룸서비스로 온 얼음을 소중히 소분해 다시 얼려두었다. 우리 위장의 튼튼함을 믿으며.


그러나 이번 여행동안 마신 맥주의 최고봉은 따로 있었으니 그건 바다 위 뱃전에서 마신 맥주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마셨다기보다 적셨다고나 할까. 이건 비유나 수사가 아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맥주에 흠뻑 젖었다. b가 야심차게 기획한 호핑투어에서였다. 실로 대단한 기획, 놀라운 여정이었다. 눈가가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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