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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량 Mar 04. 2024

14시간의 응급상황

인천에서 프랑크푸르트까지

인천에서 출발해 프랑크푸르트까진 14시간. 하루의 절반을 넘는 시간 동안 어떻게 비행을 버틸지, 그것도 꼬마와 단둘이. 벌써부터 마음이 부산스러웠다. 평정을 잃어선 안 되는데, 실수해선 안 되는데.


컨테이너로 미리 부친 짐은 한참 늦게 도착한다고 했다. 원래는 수에즈 운하를 통과할 예정이었는데, 전쟁의 여파로 길이 막혔다고. 그러면 어딜 어떻게? 무려 희망봉을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희망봉, 알지 알지. 대항해시대 게임에서 나는 악독한 선장이었으므로 배의 식량창고를 개조해 특산품을 선적하곤 했다. 선원의 수가 절반으로 줄어도 보급 없이 희망봉을 돌아 전진해 갔다. 그때의 업보를 이제야 맞는구나. 덥고 더운 바다를 지나는 동안 나의 보급품-막 도정한 햅쌀, 국간장과 양조간장을 비롯한 장류, 조미김과 미숫가루-들은 무사할 수 있을까? 불닭볶음면 너 정도면 살아남을 수 있겠니?


그래서 직접 들고 갈 가방에 들어갈 목록은 자꾸 길어진다. 버리고 떠나려던 살림들도 챙겨야 하고, 컨테이너 도착 전까지 필요한 식량도 꾸려야 한다. 이민가방 둘, 큰 캐리어 하나, 작은 캐리어 하나, 짊어질 에코백, 유아차. 필요한 짐들을 어떻게 분산해 적재해야 할지 머리가 복잡했다. 마음이 복잡할 땐 역시 단순 노동이 최고다. 과업을 회피하고 싶어질 땐 넷플릭스를 벗 삼아 뜨개질을 했다. 이건 뭐 뜨개장인은 아니고 뜨개광인이랄까. 덕분에 뻣뻣하게 곱은 손가락으로 짐을 꾸리게 되었다. 게다가 뜨개실과 뜨개감으로 짐의 부피만 늘렸다.


출국 전 마지막 저녁으론 순대볶음이 낙찰되었다. 평양냉면을 먹고 싶었던 나는 꽤 집요하게 꼬마를 꼬셔댔는데, (우리 시~원한 거 먹을까?) 꼬마는 단호하게 순대볶음이 먹고 싶다고 했다. (아니! 따뜻한 거!) 그래서 우리는 들깻가루 듬뿍 뿌려진 백순대볶음을 먹는다. 양배추와 순대와 쫄면으로 배를 따뜻하게 채운다.


공항에 도착해 낑낑거리며 카트에 가방들을 실었다. 수속 카운터까지 꽤 가까운 거리였는데 그 사이 두 번이나 가방이 쏟아졌다. 스르륵 흘러내린 것도 아니고 그냥 철퍼덕 패대기치는 모양이었다. 앞서 가던 이가 소스라치게 놀라는 걸 보니 안 되겠다. 나는 한 손으론 카트를 다른 한 손으론 나뒹구는 이민가방을 잡고 느릿느릿 걷는다. 꼬마에겐 내 옷자락을 단단히 잡으라 일렀다. 그렇게 느릿느릿 도착해 수속을 밟는데 벌써 넋이 나간 상태였는지 그만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26kg에 달하는 큰 캐리어 무게에 놀라고, 다음으론 유아차를 위탁수화물로 보내는 것에 몰두한 나머지 기내용으로 들고 탈 작은 캐리어를 덜컥 부쳐버린 것이다. 아! 혹시 취소하고 들고 갈 수 있나요? 음, 이미 짐이 넘어가버려서 찾으려면 한 시간 반은 걸릴 텐데요.

그 안엔 나의 소중한 물건들이 잔뜩 들었다. 노트북에 카메라, 각종 도장과 증명서들. 그리고 작고 반짝이는 것들. 꼬마의 돌반지부터 해가 갈수록 자꾸 값이 올라 이제는 그냥 싯가라고 걸어놔야 하지 않을까 싶은 가격의 가방들도. 그러니까 그런 물건들을 한 데 모아 손수 가져가려 한 것인데, 그걸 통째로 부치고 말았다니. 순간 머리가 새하얘졌다. 어디서 봤더라, 고액의 물건들을 위탁수화물로 부쳤다가 고스란히 도둑맞은 사례들이 떠올랐다. 물건이 거기 있었음을 증명하기 어려우므로 신고도 보상도 어려운 그런 사례들.

한 시간 반을 기다려 비행기를 놓치는 대신 나는 K-양심을 믿어보기로 한다. 인천공항 직원들의 청렴결백함에 기대 보기로 한다. 자꾸만 힘이 풀리는 두 다리를 끌며 출국장으로 향한다. 이제 내게 남은 건 에코백-타요 스티커북과 16곡 크리스피롤, 망고젤리와 여권이 든-뿐이다. 그래서 14시간의 비행이 지루할 틈이 없었다. 꼬마의 갖은 수발을 들다 겨우 몸을 구겨 눈을 감아도 머리론 가방의 행방이 떠올랐다. 부디 나와 동행하는 것이길. 어드메 구천을 아니, 당근마켓을 떠돌고 있진 않길. 그 와중에 특별기내식으로 신청한 해산물식은 정말 맛있었다. 토마토소스를 올린 관자, 새우, 생선 요리도 좋았고 간식으론 샌드위치대신 연어스테이크가 나왔다. 마지막 기내식은 부드럽게 쪄낸 흰살생선. 맛있네, 맛있어. 그런데 샤넬은 잘 있겠지?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해 짐 찾는 곳으로 바삐 향했다. 인천에선 그리 남아돌던 카트가 여기선 1유로를 내야 하다니. 대형수화물로 분류되어 먼저 찾은 유아차 하나 덜렁 두고 하염없이 컨베이어벨트를 바라본다. 피로와 긴장감에 내 눈은 자꾸 헛것을 보는 듯한데, 의외로 꼬마가 발군의 실력을 발휘한다. 엄마, 우리 가방 나왔어. 작은 가방은 저기 지나갔어. 내 눈엔 그저 다 같은 검은색 캐리어이거늘. 믿거나 말거나로 손가락질한 방향을 따라가 보니 정말이지 우리 가방이 흘러가고 있다. 녀석 참 대단한데? 돌잡이 때 마패 쥘 때부터 알았어. 타고난 여행자 스타일이군. 감탄하며 가방들을 냅다 끌어내려 가방 안을 훑는다. 뜨개노동으로 굽은 내 손가락이 자꾸만 허둥거린다.


있다, 있어. 남김없이 있어. 사랑해요 인천공항, 사랑해요 대한항공. 고객의 소리에 편지라도 쓰고 싶었다. 내용은 그저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복 많이 받으세요. 잿빛 얼굴의 나는 조용히 환호하고, 꼬마는 이제 어서 나가자며 내 손을 잡아끈다. 제 생각엔 비행기에서 나오자마자 아빠가 마중 와 있겠거니 했는데, 짐 찾느라 한참 시간을 보내자 다급했나 보다. 나는 다시 얼기설기 가방들을 카트에 올리고, 비행을 마쳐 한껏 성숙해진 꼬마에게 명한다. 이제 니 유아차 니가 밀어. 그렇게 우린 입국장 문을 나선다. 저기, 환한 얼굴의 달이 보인다. 참으로 오랜만이다. 시차가 달라 싸움도 멎었던 두 달. 나는 긴박했던 비행 이야기가 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리기 시작한다. 이제껏 미주알고주알 오만 이야기들을 나누곤 했던 그 사람이 저기 걸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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