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노바의 오징어 어린이집과 의젓한 신데렐라
이번이 세 번째 이탈리아다. 처음엔 로마에서 시작해 소렌토를 찍고 다시 올라와 피렌체와 베로나, 베네치아에 갔었다. 가봐야 한다는 곳은 바티칸 빼고 다 갔다. 베로나에선 자정 넘어까지 하는 오페라 아이다를 보며 졸았다. 베네치아에선 카메라를 도둑맞기도 했다. 두 번째는 토리노, 피렌체, 볼로냐였다. 티본 스테이크와 볼로네제 파스타로 기억하는 여행. 처음엔 기차, 두 번째는 자동차 여행이었다. 그리고 이번 역시 자동차 여행이다.
독일과 스위스 고속도로엔 없고 이탈리아엔 있는 것. 그건 바로 톨게이트다. 독일은 고속도로 요금마저 없고, 스위스 고속도로는 비넷이란 이름의 통행권을 미리 사서 부착하면 된다. 비넷 미소지 시에는 벌금이 어마어마하다고. 이탈리아엔 톨게이트도 있고 요금도 있다. 하이패스 가능한 진입로도 있지만 다들 카드나 현금 내는 곳으로 모여든다. 그러니 톨게이트를 몇 킬로 앞두고부터 줄이 길게 늘어선다. 꼬마는 달리는 차에서 잘 자주지만, 가다 섰다를 반복하면 깨곤 한다. 차는 꾸물거리며 나아가고, 나는 노심초사하며 뒷좌석 기색을 살핀다. 머리에선 벌써 시골영감 메들리가 시작되려 한다. 한참을 기다려 겨우 우리 차례가 된다. 고속도로에 들어설 때 종이 카드를 발급받고, 나갈 때는 아까의 카드를 기계에 넣으면 요금이 산정되는 방식이다.
그러니까 어릴 적 고속도로의 풍경과 비슷하다. 동전을 던져 넣는 대신 애플페이를 쓴다는 걸 빼면. 결제가 완료되면 차단봉이 힘차게 올라간다. 그 기세만큼 우렁찬 목소리의 안내 음성도 나온다. 지불 완료되었다고 잘 가라는 인사겠지. 여러모로 기세가 좋은 톨게이트, 이것마저 이탈리아 답다는 생각을 한다. 남쪽으로 내려가는 동안 볕은 더 뜨거워진다. 도로 옆으로는 밀과 옥수수밭이 펼쳐져 있다. 부디 맛있는 파스타가 되어주렴. 벌써부터 군침이 돈다. 먹으려고 이탈리아까지 온 사람답다.
잠시 휴식을 위해 휴게소에 들른다. 이것 역시 독일과 스위스, 그리고 이탈리아의 양상이 달랐다. 독일과 스위스 휴게소는 화장실 입장료를 받는다. 인당 1유로고 꼬마는 무료다. 현금, 카드, 애플페이 모두 가능하다. 결제하면 승차권처럼 작은 티켓이 나오는데 이건 휴게소에서 바우처처럼 사용할 수 있다. 볼일 보는 대신 돈 쓰고 가라는 이야기다. 이탈리아의 휴게소에선 화장실이 무료였다. 작은 간이 휴게소나 크고 번듯한 휴게소나 마찬가지였다. 기지개를 켜며 차에서 내려 휴게소의 문을 연다. 파스타, 리몬첼로, 견과류 매대를 지나면 구석에 놓인 페로니 박스들. 미국에서 왔다는 아주머니와 휴게소 직원이 커피 주문을 앞두고 대화하고 있다. 이탈리안 커피는 매우 스트롱하거든요. 그 말에 아주머니는 라떼 마끼아또를 주문한다. 좋은 선택이다.
달리고 달려 리구리아에 진입한다. 표지판엔 제노바가 나오기 시작한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다. 피곤과 설렘을 안고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역시나 우렁찬 작별인사) 도시의 고가도로에 들어선다. 언덕 층층마다 들어선 집들. 건물 외벽에 관한 국가 표준안이라도 있는 걸까. 연노랑, 연핑크 벽의 집들마다 초록의 덧창들이 달려있다. 그리고 거대한 항구, 요트와 크루즈. 꼬마는 여기가 부산 같다고 말한다. 그렇네, 정말 부산 같네. 산이 많으니 터널과 커브가 많고, 그 도로마저 여러 겹으로 겹쳐있다. 베스파들이 거침없이 치고 나가는 사이, 달이 살짝 긴장한 게 느껴진다.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나면 레스토랑들이 문을 다 닫을 시간이라, 호텔 근처의 작은 레스토랑에 먼저 들린다. 해산물요리를 주로 한다는 작은 레스토랑이다.
2인분부터 주문 가능하다는 해산물 리조또와 오징어 튀김, 그리고 지역 맥주를 주문한다. 식전빵으론 포카치아가 나왔다. 그걸 우적우적 뜯어먹고 있으니 곧 오징어 튀김도 나온다. 레몬즙을 조금 뿌려 서둘러 먹기 시작한다. 꼬마가 오징어에 대해 묻기에, 오징어잡이 배에 관해 이야기해 주었다. 깊은 밤, 환한 불빛을 보고 다가가다 그물에 걸리는 오징어들에 대해. 오징어 어린이집 선생님들과, 엄마 오징어들이 단단히 일러두었음에도 호기심에 따라가다 잡히고 만다는 교훈을 덧붙인다. 꼬마는 그 이야기가 제법 인상 깊었나 보다. 이후에도 식탁에 앉으면 오징어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다. 여행 말미엔 인어공주 이야기도 해달라고 한다. 그러니까 옛날 어느 바닷속 나라에 인어공주가 살았답니다.
동화 속 주인공들은 너무 한눈에 반하고, 너무 쉽게 목숨을 바친다. 아니면 너무 단순한 이유로 상대를 미워하고 괴롭힌다. 나쁜 아줌마랑 언니들이 신데렐라를 어떻게 괴롭혔어? 꼬마가 물어보면 나는 잠자코 신데렐라의 하우스 키핑 체크리스트를 읊는다. 물을 길어다 빨래를 하고 (세탁기 없는 거 알지?) 다 마른 빨랫감들을 다리고, 뜯어진 옷들을 수선하고, 장을 봐와서 음식을 만들고 설거지를 하고 (식세기도 없는 거 알지?) 온 집안 곳곳 청소를 하고 (청소기도 당연히 없겠지?) 모인 쓰레기를 버리고 그랬단다. 진지한 얼굴의 꼬마는 그 후로 자신의 옷을 옷걸이에 잘 걸고, 식사 전 식탁 차림을 돕고, 다 먹은 그릇은 싱크대에 잘 가져다 둔다. 하지만 장난감은 혼자서 치울 수 없다며 지조 있게 말한다. 너무 많아서 그렇댄다.
이튿날, 조식을 기대하며 식당으로 내려간다. 작지만 구색이 잘 갖춰져 있다. 셋의 선택은 비슷하면서 좀 다르다. 달은 골고루 여러 음식들을 가져다 먹는 편이다. 제노바에선 구운 야채를 여러 번 먹었다. 올리브유에 구운 가지와 버섯이 맛없을 수가 없지. 스크램블 에그, 베이컨, 치즈도 빠지지 않는다. 꼬마는 이탈리아 수박에 흠뻑 빠졌다. 가만히 두면 수박만 세 접시, 네 접시를 먹으려 든다. 어쩔 수 없이 옆자리의 나는 버터 바른 하드롤을 중간중간 꼬마의 입 속으로 밀어 넣는다. 버터 바른 딱딱한 빵, 이건 완벽한 내 취향이다. 가염버터를 바른 (스위스에선 얼터너티브 버터란 것도 보았다. 새싹 그림 위로 비건이란 문구도 있었다. 먹지 않았다) 입천장이 까질 정도로 딱딱한 빵을 즐긴다. 그리고 꿀 뿌린 요거트. 거기에 커피.
빈 접시를 채우느라 오고 가는 직원들에게 언제나 수줍게 요청했다. 컵 하나를 들이밀며 얼음 가득 채워주세요라고. 그리고 머신 앞에서 커피를 채운다. 그냥 커피 버튼을 눌렀더니 밍밍한 필터커피가 나오길래 까페 끄레마로 바꿔본다. 딱 좋다. 스르륵 녹는 각얼음, 그리고 나태한 정신을 일깨우는 스트롱한 이탈리안 커피. 아니, 아이스 아메리카노? 사실 이건 코리안 커피라고 해야지. 정확히 말하면 업무 시작을 알리는 각성용 코리안 커피. 오늘의 업무는 제노바 탐방이다. 소금기 머금은 바닷바람 속 35도의 끈끈한 더위. 경사로와 돌길을 잘 누빌 수 있을지. 일단 옷부터 시원하게 입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