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라 네키 캄필리오와 <아이 엠 러브>
-피렌체의 두오모? 왜 하필이면? 밀라노의 두오모는 안 돼?
<냉정과 열정사이>에서 쥰세이의 말이다. 피렌체의 두오모는 밀라노 같은 장엄함은 없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의 두오모'라서 아오이는 10년 후, 그곳에 함께 오르자는 말을 건넨다. 일종의 사랑 고백이었던 셈이다. 그렇다. 밤에 만난 밀라노 대성당의 모습은 지극히 화려했다. 자, 나를 봐. 내 멋진 모습을 봐. 압도적인 기운, 그리고 이를 숨길 기색도 없는 당당함. 대성당은 모인 이들의 경탄에 익숙해 보였다. 1386년에 시작해 1965년까지 이어졌다는 공사. 그 오랜 시간 동안 이 광장이 밀라노의 중심이었을 테니.
그걸 증명하듯 광장 주변은 매끈하게 반짝였다. 아케이드 안과 밖으로 가을 컬렉션을 내세운 샵들이 늘어섰고, 넓은 보도 위로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갔다. 곳곳에서 풍기는 오래된 부의 기운. 북부 이탈리아의 자존심 같은 것. 이제 막 도시에 도착한 여행자에게도 느껴지는 풍요로움. 트램을 타고 호텔로 돌아오는 길, 창밖으론 아름다운 가구 가게들이 스쳤다. 덜컹거리는 진동과 소리에 대해 묻는 꼬마에게, 이건 트램기사님 심장 소리라 말해줬더니 믿는 눈치였다. 농담이 그럴싸하게 튀어나온 건, 우리가 탄 게 나무 차체로 만들어진 아주 오래된 트램이라서 그럴 것이다. 그래서 어딘가 동화 같은 분위기가 있었다. 맞은편 자리엔 커다란 개와 함께 탄 커플. 우리 무릎에 얼굴을 부비던 강아지 이름은 네오라고 했다. 매트릭스에서 따 왔다고.
넉넉한 아침을 먹은 다음 매트를 펴고 요가도 한다. 달과 꼬마는 이른 볕에 서둘러 수영장으로 향한다. 꼬마는 비록 팔튜브를 끼긴 했으나, 처음으로 혼자 힘으로 수영장을 왕복한다. 대성당을 봤을 때보다 더한 감탄을 쏟아내는 나. 꼬마는 수영장 벽에 매달려 말한다. 나는 수영 검은 띠가 되고 싶어. 그 말은 진심이었던 모양이다. 이제 좀 쉬었다가 들어가지 그래? 물어보니 자긴 쉴 수가 없다고 한다. 계속 연습하고 싶다고. 너무나 한국인다운 모습에 내 머리는 띵하다. 순간 심즈가 스친다. 기술 게이지를 채우기 위해 키우는 심을 밤낮으로 훈련시키던 지난날. (운동 기술 향상을 위해 계속 수영장을 돌게끔 만들기도 했다. 기술 향상의 목적은 대부분 직업 승진이었다) 재밌자고 하는 게임인데 게임도 인생처럼 하고야 마는 가여운 한국인.
꼬마와 함께 하는 여행은 이전 여행과 다를 수밖에 없다. 중심축에 놀이터나 수영장이 있고, 그 주변에 간신히 우리의 소망을 끼워 넣는 식이다. 그래도 기저귀나 분유 제조, 이유식이나 낮잠 시간까지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 게 어딘가 싶다. 그때는 정말 아라비아 대상처럼 짐을 꾸려야 했었지, 그늘 드리운 나무들을 바라보며 나는 현재에 만족한다. 그래서 밀라노에서도 큰 욕심을 부리지 않기로 한다. 손가락 발가락이 모두 쪼글쪼글해질 때까지 물에서 굴리다 호텔을 나설 계획이다. 밀라노에서 이곳만큼은 꼭 가보고 싶다. 빌라 네키 캄필리오. 1935년에 지어진 밀라노의 오래된 (이 수식어는 이제 너무 당연하지만) 저택. 영화 <아이 엠 러브>의 배경으로도 쓰였던 곳.
아름다운 다홍색 지하철을 타고 (엄마! 지하철 눈이 웃고 있어) Palesto역에 내린다. 그늘을 골라가며 골목을 지나면 저택 입구의 깃발들을 만난다. 입구의 작은 화단들도 예사롭지가 않다. 소담한 꽃들이 아기자기하게 피어있다. 그 옆으로 매표소가 있다. 아마도 저택의 문지기가 살던 곳이 아니었을까. 정원만 둘러보는 것은 무료, 건물 관람은 유료. 티켓을 끊고 본격적인 탐방에 나선다. 작은 자갈들이 깔린 길. 우람한 나무들이 넉넉한 그늘을 만들어준다. 멀리론 어른거리는 수영장. 나는 한 걸음 걷다 멈추고, 두 걸음 걷다 다시 멈춘다. 딱 맞게 잠들어준 꼬마의 유아차를 밀며 천천히 나아간다. 트램처럼 쿵쿵거리는 심장을 진정시켜야 할 만큼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여름의 꽃, 유려한 곡선의 철제테이블. 다른 의미의 압도. 우리는 수영장을 발아래 두고 앉아 잠시 숨을 돌린다. 지금 느끼는 아름다움이 너무 커서 그걸 다독일만한 시간이 필요했다. 등 뒤의 까페도, 건너편의 건물도 감히 다가갈 엄두를 못 냈다. 그저 앉은 채로 와, 와, 와. 문장이 되지 못한 벅찬 마음이 테이블 위로 오고 갔다. 오후의 햇살이 수영장 위로 미끄러지고, 멀리선 자박자박 자갈을 밟는 소리가 들린다. 결국 까페로 자리를 옮길 때까지 우리가 나눈 말이라곤 밀라노 대단하네, 정말 아름답네, 같은 상투적인 말이 다였다. 겨울에 다시 와보고 싶네 정도가 제일 긴 문장이었다.
왜 겨울이었냐 하면, 그건 <아이 엠 러브>의 첫 장면 때문이었다. 눈 쌓인 겨울밤, 엠마는 시아버지의 생신 축하 자리에서 잠시 일어나 저택 문을 연다. 그리고 케익을 가지고 온 안토니오를 만난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들. 엠마는 밀라노의 도오모를 홀로 오르고, 고고한 저택 구석구석을 누빈다. 그리고 안토니오와 함께 깊은 산속 오두막까지 이른다. 오르고 걷고 달리는 여정. 그 사이 이탈리아의 아름다움이 녹아있다. 엠마가 살던 이곳에도. 건물에 처음 들어서 만난 것은 육중한 나무 계단이다. 하루아침에 만들어졌을 것 같지 않은 기품이 느껴졌다. 나는 곳곳의 공간들을 천천히 돌며 마음속 깊이 숨을 몰아쉰다. 떨리는 손으로 카메라를 꺼내고 조심스레 눈앞의 풍경을 담는다.
푸른 대나무가 아름다웠던 녹색의 응접실. 아낌없이 대리석을 쏟아부은 욕실. 어떻게 보면 남이 쓰던 화장실인데 이렇게 오래 머물며 감탄할 줄이야. 구석구석 잘 짜인 장들은 그 시절 살림 규모를 짐작케 하고, 천장까지 들어찬 책들과 곳곳의 소파들은 이곳에서 열린 파티들을 상상하게 만든다. 그리고 엠마를 실제 인물처럼 느끼도록 했다. 정원의 뒤편, 테니스 코트 앞 흔들의자에 앉아 잠에서 깬 꼬마와 놀아주면서도 그 여운에서 쉽게 헤어나오지 못했다. 나를 현실로 되돌려놓은 것은 꼬마에게 달려드는 모기들이었다. 독일과 스위스엔 없지만 이탈리아엔 있는 것 중 하나, 모기. 이리저리 손을 흔들며 모기를 쫓아봤지만 이미 꼬마의 얼굴과 팔, 다리엔 붉은 자국이 번져있다. 이번 여름 모기를 잊고 살았던 터라 바를 약도 가져오지 않았는데.
그 부푼 자리에 손톱자국을 꾹 내주면서 우리는 저택을 빠져나온다. 모기 없는 계절의 이곳을 상상하면서. 언젠가부터 내게 이탈리아는 맛있는 박물관이었다. 맛있는 것들이 지천에 널려있고, 그것만큼 많은 수의 유물이 가득한 곳. 과거의 영광에 대한 존중도 있지만 동시에 미미한 안타까움도 깃들었다. 박물관은 보존을 위한 곳일 뿐, 현재의 삶은 없으니까. 그 생각이 이곳 네키 캄필리오에서 사라진다. 아름다움을 향한 진정성과 열망. 몇 백 년이 걸리더라도 묵묵히 성당을 짓고, 몇 십 년이 지나도 원래의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보수하려 노력한다. 이상적인 가치에 대한 확고한 믿음. 내겐 없고 그들에겐 있는 것. 그러니까 파인애플 피자는 적폐고, 아메리카노는 협잡인 게 이해가 된다. 이탈리아 좋아, 이상한 흐느낌을 남기며 밀라노를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