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프리스쿨에서 살아남기
여름에 입학한 꼬마, 어느새 한 학년의 삼 분의 일이 흘렀다. 눈물 찔끔거리며 등교하던 때도 옛날 같다. 요즘은 잠시 표정은 굳어지지만 곧장 손 흔들고 선생님을 따라 교실로 향한다. 떠나기 전 깊은 포옹과 퍼붓는 뽀뽀는 꼭 필요하다. 이따가 버스 꼭 들고 와야 해, 장난감을 가져오라는 당부도 잊지 않는다.
꼬마가 다니는 프리스쿨에선 영어를 쓴다. 입학 전 꼬마가 아는 영어는 다섯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 그나마 '토일렛' 단어 하나 야무지게 배워 학교에 갔다. 그러니 선생님이 하는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는 게 당연하다. 꼬마는 눈치로 살아남는다. 같은 책상에 앉는 친구가 책을 꺼내면 따라 꺼내고, 색연필을 쥐면 따라 쥔다. 줄 긋기도 선 긋기도 따라 한다. 다행히 못 보게 손으로 가리지는 않는 모양이다. 토일렛 다음으로 익힌 단어는 '플리즈'. 급식 시간에 더 먹고 싶으면 플리즈라고 말하면 된다고 한다. (그러나 디저트는 하나만 주신다고) 그야말로 생존을 위한 고군분투다.
'라인 업', '돈 터치', '돈 스피킹', '포커스!'. 뜻을 물어보는 단어를 듣고 있으면 학교 생활이 그려진다. 줄을 제대로 서야 하고, 만지지 않아야 하는 것들이 있으며, 수업 시간에 떠드는 대신 집중을 해야 한다. ' 비 케어풀!', '클린 업', '고 아웃사이드'도 마찬가지다. 재미있는 건 바깥놀이가 하루 세 번이나 있다는 거다. 일과 시작 전, 점심 먹고 나서, 마지막으로 모든 수업을 마친 후면 교실 앞 놀이터로 몰려나간다. 미세먼지는 걱정 없고, 비가 내린 후라도 상관없다. 학교 사물함엔 장화와 멜빵 달린 방수바지가 준비되어 있다. 놀이터에서 탈출 놀이니 경찰 놀이니 모래 놀이 같은 것을 하는 모양이다. 모래투성이가 된 운동화 앞코를 보면 알 수 있다. 신발은 이따 내려서 벗어! 하굣길의 나는 뒷좌석을 돌아보며 소리친다.
하루에 한 번 독일어 수업이 있다. 인사말, 숫자, 사물의 이름 등을 배운다. 1에서 20까지 독일어로 말할 수 있게 되고부터는 뻐김이 시작되었다. 아인쯔바이드라이 하며 엄청 빠르게 읊어대며 으스댄다. 11이 독일어로 뭐야? 라고 물으면 1부터 세어야 한다는 특징이 있지만. 주절주절 독일 동요를 불러대는데 뜻은 나도 모르고 꼬마도 모른다. 독일의 명절과 관련된 행사를 하기도 한다. 한국 어린이집에서 김치를 만들고 송편 빚기를 한 것처럼. 만들기나 그리기 같은 것도 많이 가져온다. 구불거리는 글씨로 제 이름과 그린 날짜를 써놓았다. 그걸 가리키며 '네임 앤 데이트!'라고 말한다. 그걸 들으며 나는 선생님의 억양을 알게 된다.
하루에도 열몇 장씩 스케치북을 넘겨대는데, 주로 기차와 버스를 그린다. 처음엔 차체와 바퀴 정도만 그리던 것이 차츰차츰 세밀해진다. 창문과 좌석, 계단과 손잡이가 생긴다. 거기에 탄 나와 꼬마도 그린다. 사람 형상도 제법 구체적으로 변해간다. 눈썹이 생기더니 손가락도 다섯 개 만들어졌다. 굽 있는 구두도 신긴다. 다 그리고 나서 구석에 그리는 것은 벤츠 로고. 이 차는 벤츠 버스인데, 나는 앞면을 그릴 수가 없으니까 여기에 그린 거야. 3차원을 분해하여 2차원으로 재구성, 뒷걸음치다 얻어걸린 큐비즘이다.
아침과 오후에 먹을 두 개의 간식을 싸가고, 점심은 학교 식당에서 먹는다. 메뉴는 주로 파스타와 소세지, 닭요리와 감자튀김, 샐러드, 피자 등등이다. 거기에 시금치나 콩, 양배추를 곁들여 먹는다. 생선 필레나 볶음밥 등도 있다. (추피시리즈에서 본 그림과 매우 유사하다) 다행히 맛 없다는 말은 안 한다. 감자튀김 3번이나 먹었어 같은 소리는 한다. 다 먹으면 디저트를 주신다고. 디저트는 주로 과일인데, 가끔 푸딩이 나올 때도 있다고 한다. 오늘은 초코 푸딩이었어! 외치는 얼굴엔 뿌듯함마저 어려있다.
수와 글을 익히고, 같이 노는 법을 배우고, 무엇보다 살아남기를 배운다. 성장과정에 생길 수 있는 문제들을 만나면 선생님들은 늘 이렇게 말한다. 잇츠 오케이, 잇츠 노멀. 열이 나는 것, 친구의 메롱에 화가 나는 것, 넘어져서 생채기가 난 것. 모두 다 잇츠 오케이, 잇츠 노멀이다. 그걸 들으면 어쩐지 안심이 된다. 그래, 다 자라면서 겪는 일이니까. 한국 어린이집처럼 세세한 브리핑은 없다. 사진도 키즈 노트도 없지만, 딱 한 장 종이에 인쇄한 꼬마의 사진을 받은 적이 있다. 꼬마는 앞에 나가 발표를 하고 있다. 옆에 앉은 선생님이 꼬마의 손을 잡아주고 있고. 이 날의 발표 주제는 '내가 좋아하는 티셔츠'.
한국 어린이집에서 어린이날 선물로 받은 단체 티셔츠는 이제 작아졌다. 프린트된 그림의 가장자리도 슬그머니 일어나 있다. 하지만 가장 좋아하는 티셔츠이므로 그걸 꾸역꾸역 입고 갔다. 그런 스토리를 설명하기는 무리니, 꼬마는 단순한 문장만 외워서 갔다. 여기엔 세 개의 별이 그려져 있고, 이건 엄청 멋있어요. 나는 이 티셔츠를 좋아해요. 이렇게. 발표를 마치자 선생님은 이거 누가 선물해 줬니? 엄마? 아빠? 할머니랑 할아버지? 라고 물어봤다고 한다. 꼬마는 대답을 할 수 없어 머뭇거렸고, 앞에 앉은 한국인 친구가 통역을 해줬다고 한다. 참 고마운 친구네.
잘 안 벗겨지는 바나나 껍질을 까주는 친구, 도둑 없는 경찰 놀이를 함께 하는 친구(그 동네 치안이 참 좋네), 공주님 놀이에 끼워주는 친구(꼬마는 성에 놀러 온 사람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그러니까 왕자 같은 건 아닌 거다), 선생님한테 하고 싶은 말을 대신 전해주는 친구까지. 그 속에서 여러가지를 배우고 있는 꼬마.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는 책 제목처럼. 금요일 저녁이면 야호! 내일은 주말이다! 하고 신이 나는 것을 보면 웃기다. 한편으론 조금 짠하기도 하고. 앞으로도 학교 다닐 세월이 길고 길단다. 이제 시작이란다. 미적분이니 삼권분립이니 중임무황태니 그런 게 많이 남았어. 아무튼 사는 게 그렇단다.. 나는 다 끝났지롱. 차마 하지 못한 말은 여기에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