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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독일일기

바우하우스에서 보낸 밤

저기 혹시 양철북을 아시나요

by 한량

막달레나와 다리우스. 엄청난 조합이었다. 이름 이야기를 언급 안 할 수가 없었다. 둘 다 하고 싶었지만 조금 더 안전한 쪽을 택하기로 한다. 당신 혹시 황제의 후손..? 자리를 함께 해 영광이옵니다. 나는 손을 가슴팍에 올리며 목례하는 시늉을 했다. 테이블의 모두가 웃었다. 아, 페르시아에 그런 황제가 있었죠. 다리우스가 대답했다. 내 조상은 아니지만.

데사우에 있는 바우하우스에서 묵는 저녁이었다. 이곳은 1926년 문을 연 디자인 대학이다. 학생들은 이곳에 모여 건축과 예술, 디자인과 공학을 탐구했다. 나치의 탄압으로 학교가 문을 닫기 전까지 현대를 상징하는 디자인들이 이곳에서 탄생했다. 철근 콘크리트와 유리, 간소하고 명징한 가구, 기본에 충실한 디자인, 타이포그래피와 그래픽까지. 지금 눈에도 매끄럽고 깔끔한 개념들이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모토 아래 연구되었다. 지금은 바우하우스 재단에서 그때의 기숙사에서 머물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여느 호텔들처럼 사이트에서 예약하는 것이 아닌, 직접 메일을 보내 예약 가능 여부를 묻는 방식이었다. 예약이 될까? 우려하는 마음은 어린이 게스트를 위한 침대는 어떻게 준비하면 되는지 되물어오는 친절함에 사그러들었다.

그렇게 우리는 방에 들어선다. 공간은 널찍하고 말끔하다. 이인용 침대의 발치엔 간이침대 하나가 놓여있다. 격자창 앞엔 책상과 의자, 그리고 밖으로 나가는 문이 있다. 문을 열면 조그만 발코니가 있다. 옆으로, 위로, 같은 크기의 작은 발코니들이 보인다. 휘파람을 부르면 다른 방의 친구가 나와 응답했다는 발코니들이다. 작지만 실용적인 옷장, 매끈한 옷걸이. 조그만 세면대와 거울. 다행히 하이쭝의 성능은 지극히 현대적이다. 방의 온도를 따뜻하게 만들어놓고 우린 뮤지엄 까페로 향한다.

사발만 한 커피와 케익을 시키곤 방금 산 기념품을 꺼내본다. 종이로 조립하는 유명 건축물 모형으로 꼬마가 고른 것은 방금 우리가 나온 그 기숙사 건물이다. 전면엔 칸칸의 방들이, 후면엔 Bauhaus in Dessau 1925-2025 란 문구가 쓰여있다. 천장엔 조그만 태양광 배터리를 끼우게끔 되어있다. 접는 선을 따라 조심조심 건물을 만들어본다. 마지막으로 스위치를 켜니 푸른색 불빛이 기숙사를 밝힌다. 그런 놀이를 하는 사이 어둑어둑 해가 지려한다. 아직 5시도 안 되었거늘. 얄짤없이 저무는 독일의 해. 순전히 소화를 시킬 요량으로 우린 까페를 나선다. 어차피 저녁도 여기서 먹을 계획이다. 왜냐하면 여긴 정말 한적한 마을이니까.


꼬마는 자전거를 타고 우린 걷기로 한다. 길은 평평하고 공기는 맑고 차는 거의 없다. 산책하기 딱 좋은 배경이다. 아무래도 이 학교에서 위대한 예술가들이 배출된 이유를 알 것만 같다. 번뜩이는 시절의 청년들을 여기 외딴 시골에 모아놓고, 함께 어울려 지내게 했으니. 심심해서라도 작업실에 갔을 것만 같아. 가서 뚝딱뚝딱 스케치하고 그러다 또 낄낄거리고 그러지 않았을까? 이른 저녁, 아니 늦은 오후라고 해도 좋은 시간. 사방은 고요하다. 동네 순찰을 마치고서 다시금 까페로 돌아오는데 아니 이게 무슨 일이람, 까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대체 이 사람들이 다 어디에서 나타난 거람? 땅에서 솟아오르기라도 한 걸까. 흥겨운 얼굴로 수다를 떨고 있다.


아까 인사를 나눈 직원에게 애처롭게 간구해 보지만 자리가 없다. 그럼 어떻게 하지? 다른 식당을 찾아야 하나 싶은데, 한 아저씨가 일어나 우리에게 다가온다. 아까 우리가 커피를 마시고 기숙사를 조립할 때 옆 테이블에 앉았던 분이다. 그러니까 꽤 오랜 시간 까페에 있었던 것 같다. 아, 그럼 이제 가시려나보다. 우리 보고 그 자리에 앉으라고 하나 봐. 정말 고맙다! 싶었는데 아니었다. 괜찮으면 자기 테이블에 함께 앉아도 좋다는 거였다. 그러더니 다른 테이블에서 빈 의자 하나를 빌려오기도 한다. 흠, 어쩌지? 슬쩍 고민하다 일단 감사하다고 인사하며 자리에 앉았다. 꼬마를 데리고 다시 나가기엔 밖이 너무 캄캄했기 때문에. 약간의 어색함을 감수하기로 했다.


햄버거와 스파게티, 주스와 맥주를 시키고 우리는 애매한 웃음과 함께 통성명을 한다. 서로의 이름, 그리고 사는 곳과 하는 일. 막달레나와 다리우스는 만하임에 산다고 했다. 오! 저희는 프랑크푸르트에 살아요! 두 도시는 멀지 않다. 차로 1시간 안 되는 거리다. 그리고 지금 여기는 베를린 근처, 동독 오브 동독이다. 동향 사람이라면 동향 사람, 동시에 살가움을 느낀 순간이었다. 그들은 이번이 세 번째 바우하우스 방문이라 했다. 둘은 독일에 온 지 30년 된 폴란드 사람으로 종종 그단스크를 방문한다고 했다. 데사우는 여정의 딱 중간이라 하루 자고 가기 좋은 곳이라고. 그단스크란 이름을 듣는데 머리를 스치는 게 있었다. 그단스크? 단치히? 오스카? 양철북?


그래서 나는 갑자기 양철북을 아냐고 묻기 시작한다. 폴란드와 슬라브 문학을 전공했다는 막달레나의 눈도 반짝이기 시작한다. 나는 그 소설을 정말 인상 깊게 봤다. 그래서 언젠가 꼭 단치히를 가겠다고 생각했다. 오래전에 읽었지만 아직도 그 장면을 상상하면 놀랍다. 바다에 빠진 말머리.. 막달레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다리우스는 영화로도 보았냐고 묻는다. 아뇨, 전 영화는 안 봤어요. 하니 아주 놀라운 장면이라고 한다. 알죠.. 안 봐도 알죠.. 영상으로 보면 기절할 것 같아요. 귄터 그라스 대단한 사람.. 정확히 말하면 미친 사람.. 우리의 이야기는 하인리히 뵐에도 이른다. 카탈리나 블룸의 로스트 아너? 하니 맞다고 한다. 이야기는 깊어지고 어쩐지 우리는 조금 친해진 느낌이다. 고마워요, 민음사. 덕분에 새로운 친구를 이렇게도 만나게 되는군요.


달은 그들에게 술을 한 잔씩 산다. 괜찮다는 말에 이게 코리안 스타일이라고 한다. 그렇지, 아무렴. 자리까지 내어주신 분들에게 입을 싹 닦을 수는 없지. 신난 내 잔도 빈 지 오래. 다리우스는 자신의 맥주병을 들어 내 잔에 기울여준다. 막달레나는 엊그제 찍었다는 그단스크의 사진을 보여준다. 청명한 하늘 아래 고풍스러운 시가지가 눈에 들어온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곳, 살았던 곳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서울은 어때? 살기 좋아? 독일과 비슷해? 라는 물음에 우린 잠시 기억을 더듬는다. 우선 사람이 정말 많아요. 정말 정말 많아요. 로 시작된 이야기는 도시의 중심에 위치한 궁궐 이야기까지에도 번진다. 덕분에 떠오르는 서울의 풍경들. 케데헌을 보진 않았을 것 같아 꺼내진 않았지만 입 안에 맴도는 북촌, 낙산공원, 한강.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의외로 꼬마는 조용하다. 다리우스가 라부부 펜을 가져가 그림을 그려도, 색종이로 비행기를 접어 날려도 샘내지 않는다. 비행기가 번번이 우스꽝스럽게 추락해서 그랬을까, 기숙사 종이 모형을 가리키며 우리 방은 여기야, 말해줘서 그랬을까. 결국 나는 다리우스가 새로 주문한 맥주의 절반쯤을 얻어마셨다. 사주고 뺏는다, 이게 코리안 스타일은 아닌데 말입니다. 꼬마가 하품을 한다. 다리우스는 자신의 메일 주소를 적어준다. 도메인은 .pl로 끝난다. 이게 폴란드 스타일일까. 달은 흔쾌히 함께 찍은 사진을 보내겠노라 말한다. 이건 부담스럽지 않지만 은근한 마음을 표현하는 연락 방식 같다고, 달이 말한다. 꼬마는 도롱도롱 코를 골고, 우리는 맥주 한 캔을 마저 나눠마신다. 그렇게 바우하우스의 밤이 깊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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