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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감 Nov 23. 2024

겨울이 속삭이는 지혜

물극필반 物極必反의 원리

© 몽몽, 출처

 

국민학교 (초등학교) 때 겨울날을 기억한다. 학교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누렇게 마른 비포장길, 가장자리엔 지난주 내린 눈이 거뭇하게 쌓여있었다. 지금보다 조금 더 추웠을 당시, 집에 들어서자마자 란도셀 가방은 대청에 팽개치고 안방 아랫목에 언 손을 녹이는 둥 마는 둥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 시절 아이들의 '게임'은 모두 동네 마당에서 펼쳐졌다. 자치기, 다마치기( 구슬치기), 딱지치기, 찜뽕(야구와 비슷한데 투수가 없음) 따위 놀이가 계절의 흐름을 따라 자연스레  바뀌었는데 누가 그 유행을 주도했는지는 모르겠다. 


외할머니는 가을이 채 가기도 전에 벌써 월동 준비를 걱정하셨지만, 나는 반대로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부터 다가올 그 차가운 계절을 지루하게 기다렸다. 


얼어붙은 개천에서 썰매를 타고, 함박눈이 내리면 동네 아이들과 함께 눈싸움을 할 수 있는 그 계절은 특별했다. 더욱이 크리스마스, 설날 등 아이들을 들뜨게 하는 화려한 '대목'이 몰려있는 것도 겨울을 기다리게 한 이유였을 터이다. 연탄, 김장으로 대표되는 겨울나기 준비의 고단함은 어른들의 몫이었고, 아이들에겐 추위가 고통이 아닌 즐거움이었기에 외투와 목도리를 챙겨주며 감기 조심하라던 어른들의 걱정은 그저 먼 나라 얘기로만 들렸다. 


세월이 흘러 이제 나는 추위가 불편한 노인이 되었다.


겨울은 자연인에게 있어 생존을 위한 혹독한  도전의 시기다. 따뜻한 햇볕과 풍부한 양식이 사라지고, 매서운 추위와 짧아진 낮이 삶을 옥죄어온다. 인류가 오랫동안 자연과의 투쟁 속에서 발전시킨 생존 기술엔 추위의 극복이 있었다. 지금도 우리는 겨울이 되면 옷깃을 여미고, 귀가를 서두르고, 따뜻한 음식을 찾으며 의식주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는다.


서양에서도 겨울은 암울하고 어두운 면을 상징해 왔다.  'Winter is coming 겨울이 온다'는 단순한 날씨의 변화를 넘어, 시련과 고난을 경고하는 표현이다. 미국의 유선 방송 HBO의 인기 시리즈 '왕좌의 게임'에서 스타크 가문의 가훈 'Winter is coming'도 다가오는 위기에 대비하라는 독려의 메시지다.


서양문화에서 겨울을 어둠, 죽음, 쇠퇴와 같이 부정적이고 적대적인 이미지와 연결한 반면, 동양 사상은 겨울을 자연의 순환 과정 중 하나로 받아들이며  몸과 마음을 재충전하고 휴식을 취하는 시기로 여겼다. 


'물극필반 物極必反'은 세상사가 극에 달하면 반드시 뒤 바뀐다는 원리다. 같은 맥락에서 동양의 경전 주역 周易에서는 연중 해가 제일 짧은 동지를 양기陽氣가 시작되는 시작점으로 보았다. 어둠이 극에 달하면 반드시 빛이 온다는 믿음이다. 


흔히 겨울을 마지막 계절로 생각하지만 자연은 이미 다음을 준비하고 있다. 꽁꽁 언 대지 아래서는 이듬해 봄의 설계도가 완성되어 가고, 앙상한 가지 끝에서는 새 생명이 움트고 있다. 아이들이 겨울을 좋아하는 이유도 천지만물의 순환 이치를 태생적으로 터득했기 때문일까?


힘겨운 시간도 언젠가는 지나가리라는 희망을 겨울은 조용히 속삭이며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 


겨울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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