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庶' 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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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철만 되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재래시장 먹방. 입후보자가 좌판 앞에 서서 종이컵에 든 어묵 국물을 후룩 들이켜며 다른 한 손으로는 순대를 집어 든다. 옆을 에워싼 측근들은 괜히 사람 좋은 표정들을 연출하고... 뉴스 가치가 하나도 없는 식상한 정치쇼에 때마다 카메라를 들이대주는 언론도 무던하다.
'서庶'는 많다는 뜻의 한자다. '서민庶民'을 풀어 읽으면 '많은 백성'이 되지만 일상에서는 사회 경제적 하위 계층이라는 어감이 있다. 작은 조직에서 '서무庶務'는 '특별한 명목이 없는 여러 가지 잡다한 사무'라고 사전에서 정의하고 있다. '여러 방면에서 정치 폐단을 고쳐 새롭게 한다'는 '서정쇄신 庶政刷新'이 간신히 '서庶 씨 일가'의 체면을 지켜준다.
'서민'은 다수이지만 '엘리트'는 언제나 소수다. 사회 구조 자체가 피라미드 모양이라서 꼭대기는 좁을 수밖에 없다. 결국 엘리트가 소수임은 절대적이 아니라 상대적인 개념이다. '소수니까 엘리트'라는 얘기.
엘리트는 자신들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서민'을 '낮은 계층'으로 구분하고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어왔다. '서민'이라는 말이 '하층민'으로 들리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치인들이 백화점이 아닌 재래시장을 찾는 이유는 무엇보다 상인, 고객이 모두 고단한 '서민'이고 덩달아 '서민 흉내 내기(=코스프레)'에 그럴듯한 현장일 거라는 '재래식' 사고방식에서 비롯된다. 유권자 대다수를 차지하는 '서민'의 표가 절실한 선출직 후보 입장에서 나름 전략적 행동일지언정 신념이나 공감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오늘날 재래시장은 여러 계층의 상인과 고객이 어우러지는 공간이며, 그들 중 일부는 상당한 자산가일 수도 있다. 단순히 재래시장을 '서민'의 상징으로 규정하고 외치는 '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당신이 바로 시장市長입니다...' 따위 위선적 구호는 '침대는 과학이다.' 보다 더 황당하다. 그리고 역겹다.
선거운동 기간에 정치꾼들이 으레 시장을 돌고 지하철에 올라타는 어설픈 '서민' 척은 오히려 '서민'을 ‘낮은 계급’으로 못 박는 은유가 된다. '당신들을 이해해 주겠노라'는 오만한 계급적 시선이 이면에 가려져있다.
정치 엘리트들은 '서민'처럼 보이는 연기는 하되 정작 '서민'과 같은 처지로 살아갈 의지는 없다. 되레 그들에게 정치는 (설사 '서민'의 살림살이가 넉넉하더라도 ) 밋밋한 '서민' 신분에서 벗어나는 탈출구이자 엘리트로서 다수를 통치하는 수단일 뿐이다. 그들은 '서민'을 이해하려 하기보다 '서민'을 다뤄야 할 존재로 삼는데 익숙하다. '서민'을 위한답시고 내놓는 정책들이 현실과 동떨어진 것도 이 때문이다.
이제 '서庶'가 빛을 보는 시대가 도래했다.
정보와 지식이 개방된 이 시대를 주도하는 주체는 바로 변화의 중심에 서 있는 '서민'이다. ‘서민 경제’가 소비문화를 이끌고, 소셜 미디어에서 새로운 담론을 형성하는 것도 다수의 '서민'이다.
강물이 수많은 개천과 빗방울이 모여 거대한 흐름이 되듯, 역사와 문화 역시 무수한 '서庶'의 조각들이 쌓여 완성되었다. 역사의 펜은 이제 위대한 엘리트보다 다수의 '서민'들 손으로 넘겨지고 있다.
엘리트가 '서민'을 다루는 시대는 저물고, '서민'이 엘리트를 선택하고 평가하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
더 이상 '서민'은 피동적으로 다스림을 기다리는 존재가 아니다. 더 이상 '서민'은 엘리트로 선택받지 못한 다수가 아닌, '서민'의 삶을 선택한 다수다. '서민'은 이제 실패한 다수가 아닌, 많음이 곧 강력한 힘인 다수다.
'서庶’의 부상은 단순한 반전이 아니라, 우리가 '낮다'라고 여겼던 것들 속에 진정한 생명력이 숨어있음을 증명하는 사례다.
과거에는 '잡雜', ' 속俗', '서庶' 등이 격이 낮고 변변찮은 것들을 가리켰다. 하지만, 현대사회는 이들이 가진 다양성과 실용성, 민중적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고 있다. 잡스러움(雜)이 창의력이 되고, 속된 것(俗)이 문화가 되듯, '서(庶)'는 보잘것없는 변방에서 세상을 움직이는 중심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