닮은 듯 다른 듯, 함께 가는 이웃
일본에 3-4일 다녀왔습니다. 단체로 도심지 몇 군데를 들러보는 관광인데요, 도쿄는 참 오랜만에 갔습니다.
찬찬히 살펴볼 기회는 별로 없었지만, 길거리나 공원에서 맞닥뜨린 현지인들에게서 왠지 모를 시들함이 느껴지데요. 오히려 반짝반짝 생기 넘치는 존재는 관광지의 외국인들이더라고요. 지하철 '유라쿠초' 역의 역무원은 드라이버로 개찰기를 열어 지하철 표를 회수해 가며 도와주는가 하면, 국제도시 한복판 '우에노' 역의 젊은 안내원은 영어로 뭐라고 물어보니 피곤하다는 표정입니다.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도 변화를 주저하며 자기들만의 익숙한 방식에 안주하는 일본의 단면이랄까요. 당연히 일본의 경제 침체를 의식한 저의 지극히 표피적이고 주관적인 감상에 불과합니다.
예전 80-90년대엔 '재일교포'하면 곧 부자 사업가로 통했지요. 플라자 합의로 엔화 가치를 강제로 급등시킨 영향도 있었지만, 일본은 90년대 세계 GDP의 17%까지 차지하며 '태양처럼 뜨는 나라'로 불렸습니다. 그러나 30여 년이 지난 지금 그 '17%'는 중국으로 넘어갔고, 일본은 '잃어버린 30년'이라는 수식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건 일본 경제 추락의 서사가 한국의 상승 곡선과 맞닿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미국 전자제품 대리점 입구에 버티고 있던 소니의 트리니트론 TV가 삼성의 액정 TV로 교체되는 과정이기도 했지요.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6.25 전쟁 때 일본은 미군의 병참기지 노릇을 하며 2차 대전의 잿더미에서 재건의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한편 1970~80년대 한국의 산업화 과정에서는 일본 기업들이 기술 이전, 생산 설비 제공, 자본 투자 등으로 긍정적 영향을 준 게 사실이고요. 오늘날 한국이 반도체로 주목받는 것도 일본이 전자제품으로 세계를 사로잡았던 과거와 닮아 있지요. 두 나라가 역사의 교차로를 번갈아 통과하며 발전했다고 하면 너무 밝은 면만 본 걸까요?
아마 일본을 가장 과소평가하는 나라가 한국일 거예요. 과거 경제적으로 많이 뒤처졌을 때도 우리는 일본을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었지요. 일제 만행에 대한 피해의식, 과거사에 뻔뻔한 그들의 역사인식, 아울러 우리가 중국 문화를 일본에 전수해 줬다는 문화적 우월감이 작용했을 테지요. 에도江戶 시대에서 메이지 유신으로 넘어가는 260년 동안에 그 격차가 역전되었는데도 우리는 여전히 전통적 동아시아 화이華夷 질서관에 머물러있었던 게 아닌가 합니다. 이러한 의도적인 외면과 자만은 상대에 대한 무관심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흔히들 일본이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하는데요, 상대에 대한 (아마 적대감 때문이겠지만) 얕은 이해에서 비롯된 거리감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경계심이 높아질수록 오히려 상대를 꿰어 볼 통찰이 필요한 법입니다. '일본을 아는 만큼 (지일知日) 이용할 수 있고 (용일用日), 이용하면 극복할 수 있다(극일克日)’는 말처럼, 진정한 경쟁력은 냉정한 이해에서 시작됩니다. ‘일본 놈'들한테 배울게 뭐 있냐는 날 선 반응은 과거사에 매몰되어 미래 지향적 학습을 거부하고 고립을 자초하는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두 나라의 문화적 접점은 언어에서도 드러납니다. 한국어와 일본어는 말과 글에서 낱말을 연결하는 순서(어순 語順)가 같습니다. 중국어나 영어와 다르게 주어 다음에 (동사가 아닌) 목적어가 오지요. 아울러 양국의 언어는 문장에서 '가', '은', '도'와 같은 조사 한 음절로 다른 언어에서는 길게 설명해야 할 미묘한 뉘앙스를 한 방에 전달할 수도 있습니다. 언어 구조의 닮은 꼴에서 사유 방식의 공통점을 읽어내는 '언어 결정론'이 지나친 비약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일본의 언어정책에서도 참고할 점이 있습니다. 어차피 우리나라나 일본이나 한자어 어휘를 많이 사용합니다. 일본처럼 한자를 병용하는 방식은 단어의 의미를 보다 쉽게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어떤 언어든 단어의 깊은 이해를 위해서는 어원과 단어의 결합방식을 아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지요. 한글 전용 세대의 '상언의원', '공수레 공수거' , '봄보기로 삼다' 따위의 우스꽝스러운 실수는 계속될 수밖에 없겠지요, 한자어 어휘를 하루아침에 고유어로 바꾸지 않는 이상은요.
한일의 공통점은 과거 유산보다는 미래 자산으로 활용가치가 큽니다. 오늘날 한국이 경험하는 저출산, 고령화, 청년실업 등 사회문제는 일본이 조금 먼저 겪고 있는 과제들입니다. 일본의 선행 경험에서 해법을 모색할 수 있지 않을까요?
같이 고민할 당면 과제도 있네요. 다가오는 A.I. 주도 4차 산업혁명의 성패는 엔지니어의 양과 질에 달려있다는 데 이견이 없습니다. 최근 언론 기사에 의하면 A.I. 상위 50개 대학 중 북미에 32곳, 중국에 7곳이 있는데 한국과 일본엔 한 군데도 없다는군요. [기사 인용 : Foreign Affairs , A Better Way to Defend America]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한국인) 관광 가이드가 '방문국 문화'를 열심히 설명해 줬어요. 우리 한국 사람들이 현지인들에게 나쁜 인상을 주지 않도록 줄 서기, 교통질서 등 유의할 공중도덕을 당부하는 충정衷情은 이해하지만, 한 집단의 행동 양식을 '이 나라 사람들은 원래 이렇다' 식으로 절대 진리인 양 고체화하는 문법엔 거부감이 생기더라고요. 시대적, 사회적 환경에 따라 변화하는 공동체적 조건 반사와 그 나라의 국민성은 구별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예절 하면 우리 한국 사람이 어디 가서 빠지지 않아요. 다만 그 기준에 따라 다름이 있을 뿐이지요. 이번 여행에서 한국어가 조그맣게 병기된 안내판을 자주 마주쳤는데, 뭔가 통제하는 자리에 한국어가 유독 도드라지게 인쇄된 안내판이 거슬렸습니다. 괜한 자격지심이겠지만 마치 우리 들으라고 하는 소리로...
짧은 여행이었지만, 과거의 그림자와 미래의 가능성이 공존하는 일본을 보며, 이웃으로서 더 깊은 이해와 교류의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커피 잔에 가라앉은 찌꺼기 같은 역사의 쓴맛은 잠시 덮어둬야겠지요.
마지막 날 짬을 내서 우에노 공원에 있는 도쿄 국립 박물관을 찾아갔습니다. 한국관에 올라가서 늘어선 고려청자나 조선백자들을 지나치면서 그러려니 했는데, 최충헌의 묘지석을 마주하고는 의아했습니다. '네가 왜 거기서 나와?' 묘지墓誌석은 죽은 사람의 생애를 기록하여 시신과 함께 매장하는 부장품이니까 도굴의 결과물일 가능성이 높아요.
최충헌은 고려 무신정권의 후반부를 장악한 인물로, 쿠데타 정권에 다시 쿠데타를 도모한 셈이지요. 무신이 나라를 지키기보다 정권 다툼에 집중했고, 결국 고려가 원나라의 속국으로 전락하는 바람에 고려 왕들은 '조'나 '종' 묘호 대신에 '충' 자 돌림으로 불리게 되었지요. 이성계를 포함한 고려 무신들이 군사력을 키우고 실질적인 방어책을 마련했다면 동아시아의 구도는 지금과 달라졌을지 모를 일입니다. '역사에 가정이 없다'라는 말이 저는 좀 나태하게 들려요. 복기도 하고 반성도 해야지 역사가 발전하지 않을까요?
묘지석 사진을 확대하면 '壁上三韓三重大匡(벽상삼한삼중대광)…'으로 시작합니다. 검색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 최충헌의 품계, 관직명입니다. 고려나 조선이나 죽은 이의 벼슬을 뻥튀기하는 전통은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합니다.
일본은 왜 최충헌의 묘지석을 가져왔을까요? 에도 막부의 초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닮아서일까요? 좌우간 남의 나라 식민지가 되면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호텔 방 테레비에서는 이시바 수상이 상품권을 받았다는 건지 줬다는 건지 연일 시끄러웠고요... 닮기는 닮았어요, 여러 가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