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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깊은 바다 May 28. 2024

조화로운 삶의 기쁨

<50살이 되기 전에 한 50가지 일, 여행>

올봄 유난히 날씨가 좋지 않았다. 구름이 끼고, 미세 먼지도 심해, 해조차 볼 수 없는 날이 이어졌다. 봄비도 자주 내렸다. 그러다 며칠 전부터는 날이 이렇게 좋을 수 있나 싶었. 하늘은 파랗고, 햇볕은 따사롭다. 록은 봄빛을 받아 눈부실 정도로 푸르렀다.

금요일 오후, 반가를 내고 내비게이션에 여수 찍었다. 한 달 전에 계획한 여행이다. 아내는 내게 일정을 짜 보라고 했다. 나는 말했다. "우리 광양에 가 볼까?" 백운계곡이 좋다는 얘기를 여러 번 들은 터였다. <이비에스(EBS) 한국 기행, 함께하니 행복해 3부>에 나오는 하조마을에도 가보고 싶었다. 거기에 출연했던 글벗 선생님을 보고 싶었던 게 더 크긴 했다. 그분과 1월에 한 약속은 까맣게 잊고 있었지만 말이다. 
 
첫날은 여수에서 보냈다. 밤새 선잠을 다.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오후 늦게 커피를 마신 데다 잠자리까지 바뀌어서 더 그랬던 것 같다. 나는 꽃가루 알레르기까지 심해져 눈도 빨갛게 충혈됐다. 정신이 멍했지만, 티를 낼 수 없었다. 아내가 가까운 데 가자거나, 숙소에서 쉬자고 하 낭패다. 다행히 날이 좋아 아내 바깥바람 쐬 했다. 우리는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숙소를 나섰다.

광양 백운산(1,279m) 자락에 들어서니 산세가 웅장했다. 수련한 경관을 끼고 예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곧 하조마을 나타났다. 계곡을 옆에 두고 펜션이 늘어섰다. 글벗이 운영하는 하조나라 간판도 보였다. 카페와 펜션을 같이 한다고 했다. 하조나라로 들어서는데 가슴이 콩닥거렸다. 어른이 돼 좋아했던 중학교 선생님을 만나러 간다면 이런 기분일? 선생님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궁금했다. 시간은 벌써 두 시를 넘어섰다.

피자를 굽는 화덕 앞에서 남편분이 일하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봤지만, 선생님은 안 보였다. 우리는 남편분에게 피자를 먹을 수 있을지 물었다. 다행히 굽는 데 20분쯤 걸린단다. 마르게리타 피자(둥글납작한 밀가루 반죽 위에 토마토, 모차렐라 치즈, 바질을 얹어 만든 피자)를 주문했다. 계곡이 잘 보이는 야외 탁자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는 고개를 사방으로 돌려가며, "와. 좋다."를 연발했다. 넓이가 4m쯤 되는 성불계곡을 흐르는 물바위 휘감아 돌며, 쏼쏼 쏟아져 내렸다. 정원의 나무들은 조경 전문가가 다듬은 듯 수형이 좋았고, 연두색 잎을 가득 달아 울창다. 화단의 여러 종류의 꽃도 아기자기하게 피었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카페를 둘러봤다. 문을 열면 그분이 을 것도 같았지만, 인기척 없다. 안은 프로방스풍(프랑스 남동부인 지중 해안에 이르는 지역의 특색)으로 꾸며졌고, 여러 종류의 책도 보기 좋게 진열돼 있다. 내 눈에 들어온 건 색 바랜 <에세이 문학(계간지)>이다. 선생님의 글체에 영향을 준 책일 것 같아 좀 더 유심히 살펴봤다. 나는 밖에 나와서도 연신 두리번거렸다. 온 지 10분을 넘어서자 살짝 다. 기다려 보다 안 되면 남편분에게 안부나 여쭈려고 했다.

그 순간, 카페 문이 열렸다. 나는 한눈에 알아봤다. <티브이(TV)는 사랑을 싣고>의 배경 음악인 '더 파워 오브 러브(The power of love)'가 머릿속에서 연주다. 선생님은 물과 컵을 들고 점점 다가왔다. 그리고는 나를 보더니 깜짝 놀랐다. 그러며 활짝 웃었다. 너무 빠르게 알아봐서 감탄스러웠다. 선생님은 말했다. "순천 00 교회 성도님이시죠?" '그래 선글라스를 꼈으니, 당연히 몰라 보겠지.' 나는 미소 지으며 선라스벗었다. 선생님은 손뼉을 치며 말했다. "전에 수련회 때 오셨던 성도님 맞지요?" 아내는 살포시 내 눈을 바라봤다. 나는 당황스럽기보다 그 상황이 웃겼다. 나는 다시 말했다. "저, 황 00입니다." 그래도 안 되자 "글쓰기요."까지 보태야 했다.
  
선생님과는 글쓰기 수업을 2년같이 들글벗이. 화상(인터넷 줌)으로 수업하다 보니, 직접 본 건 이번이 처음이다. 게다가 나는 바쁘다는 핑계로 결석도 자주 했다. 아주 작은 화면으로 몇 번 마주친 게 다인데 어쩌면 모르는 게 당연했다. 단체 카톡방의 프로필 사진도 제일 잘 생 보이는 것으로만 골라 올렸으니, 그럴 만했다. 나는 여러 해 공부하면서 많은 글벗 만나고 헤어졌다. 그런데 올 1학기 수강생 명단에 선생님이 빠진 걸 보고는 더 많이 섭섭했다. 선생님의 글이 마음에 들어 빼놓지 않고 읽었다. 필명이 온도였는데, 쓰신 글도, 내 글에 남겨준 댓글도 온돌 아랫목처럼 따뜻했다. 수필은 자신의 깊은 내면을 드러내기도 하는데, 그런 글을 자주 공유하다 보면, 알게 모르게 두터운 공감대가 쌓이기도 한다. 선생님과도 그랬다.
      
선생님은 내 정체를 알고서는 상상도 못 했다면서, 들뜬 목소리로 "너무 반가워요."를 서너 번 반복했다. 그러면서 커피를 내올 테니 조금만 기다라고 했다. 나는 두세 번 사양했지만, 호의를 계속 거절하는 것도 예의는 아닌 것 같았다. 곧 피자 나왔다. 한 조각 들고 입에 넣었는데, 입과 눈, 귀는 물론 마음마저 행복했다. 나는 인천에서 먹 피자를 최로 쳤다. 목포에서 놀러 온 가족을 데려갔다가 대기 줄이 길어서 포기하기도 했다. 늘부로 그 순위가 바뀌었다. 맛은 우열을 가리기 어려웠다. 치즈는 쫀득하면서 부드러웠다. 토마토는 신선하고 달콤했다. 빵은 바삭고, 고소했다. 무엇보다 속이 편안했다. 하지만, 신록을 보며, 계곡 물소리를 듣고, 여유를 만끽하면서 입까지 호강하고 있으니 당연히 제일이었다. 선생님이 가져 커피는 향근했다. 입안에서 포근하게 그리고 부드럽게 감돌았다. 직장 동료가 고급 원두로 내린 커피만 마신 다고 했는데, 이런 이유인가 싶었다.

선생님은 우리 곁에 앉아 시간도 내 주었다. 조화로운 삶의 기쁨을 추구하는 하조(하모니(Harmony)&조이(joy))나라의 탄생 역사와 하조마을(하조는 봄에 남쪽에서 날아와 여름을 보내고, 가을에 다시 남쪽으로 날아가는 철새를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에서 즐기는 달콤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선생님은 수국이 피면 다시 놀러 오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나는 선생님의 고귀한 분위기를 따라가지 못하고 "수국을 사 보니, 참 비싸던데요."라 말했다. 선생님은 손짓하며, 수국을 하나 줄 테니 가자고 했다. 나는 커피와는 다르게 덥석 고맙다고 했다. 핑계를 대자면 수국은 꺾꽂이가 쉬워서 갓 자란 묘목을 주려나 싶었다. 그런데 웬걸, 조금 더워지면 꽃이 화려하게 필 연두색 잎과 줄기가 무성한 화분을 내어주었다. 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키우는 걸 선물하는 게 어떤 의미인. 수국을 트렁크에 실으면서부터 여수로 돌아오는 내내 선생님에게 미안하고, 고마웠다.

그 감정은 숙소에 들어와서도 잦아들지 않았다. 혹시나 남편 아끼는 걸 상의도 없이  건 아닌지 걱정도 됐다. 카톡으로 고맙다는 표현이라도 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오늘 환대해 주어서 너무 고맙다는 문자를 보내고 나니, 1월 한 약속이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시간이 지나면서 희미한 기억으로 머릿속 아주 작은 구석에 남아 있었나 보다.

나는 1월 15일 목포로 발령받았다. 글벗들이 모인 카톡방에 그 소식을 렸다. 선생님의 카톡이 왔다. '집에 내려온 걸 축하하며 복 많이 누리고, 주변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실 걸 믿기에 하나님께 기도드리겠다.'라는 내용이었다. 쓴 글에 댓글을 다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소통이 없던 분이라 더 반가웠다. 나는 남도에 왔으니, 하조나라에 놀러 가겠다고 했다. 선생님은 '신록 솟는 봄에 오세요. 미모뿐만 아니라 속사람까지 멋진 청년을 보고 싶어요.'라는 문자로 내게 감동을 주었다. 그 다짐신록 한창 봄이 곧 막을 내릴 5월 중순서야 소중하게 이뤄다. 그것도 올봄 가장 화창했던 토요일에.
 
《조화로운 삶》을 쓴 니어링 부부는 '자연에서 서로 돕고 기대고, 자유로운 시간을 누리며, 좋은 것을 창조하는 게 조화로운 삶'이라고 했다. 그곳에 가면 옥빛 계곡물을 보고 물소리를 들으며, 여러 꽃 향기에 흠뻑 취해 보자. 맛있는 걸 나눠 먹으며 좋은 사람과도 속삭이자. 그러면 기쁨이 넘칠 것이다. 나는 그날, 복이 넘치는 감흥에 젖어 깊게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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