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관님! 교육 좀 가 주실 수 있을까요?"
작년에 본청에서 같이 일했던 김 주무관에게 전화가 왔다. 우리 국에서 세 명이 가야 하는데, 한 명이 부족한 모양이었다. 교육 신청 메모를 보고 연락이 올 수도 있겠다 싶었다. 마감일까지 이름을 올린 사람이 두 명뿐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저기 전화하고 있는데, 다들 안 가신다고 하네요. 사무관님이 이번에 가시면 좋을 것 같은데"
김 주무관은 대여섯 명에게 의향을 물어보고, 거의 막바지에 이르러 나에게 전화한 듯했다. 같은 일을 했으니, 자신의 처지를 이해해 줄 거라는 기대를 품고 말이다.
"다른 사람에게도 연락해 보고, 그래도 없으면 내가 갈게요."
직접 나서기는 그렇지만, 누군가 등 떠밀어주었으면 했던 마음을 김 주무관이 알아준 것일까!
며칠 지나서 다시 전화가 왔다. 김 주무관은 "사무관님은 꼭 통과하실 거예요"라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그렇게 '사무관 역량 향상 과정 교육' 대상자가 됐다. 이 교육은 서기관으로 승진하려면 꼭 이수해야 한다. 문제는 자리만 지켜서는 수료할 수 없다는 거다. 3일 교육하고 마지막 날, 역량 평가 시험을 본다. 서류함 기법, 역할 연기, 구두 발표, 집단 토론 등 네 개를 평가하는데, 난이도가 꽤 높다. 여기서 떨어져 의기소침해하는 직원도 여럿 보았다. 그래서 진급을 앞두고 있지 않거나, 진급에 특별히 미련이 없다면 피하려고 한다. 그래도 합격률은 90% 가깝다. 자신이 그 나머지 10%에 해당한다면 더 괴로운 일이다. 다음 진급을 꿈꿔 보지도 않은 2년 차 사무관인 나에게까지 기회가 주어진 이유일 것이다.
그 교육을 가고 싶었던 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관리자로서 역량을 객관화해 보고 싶었다. 우리 계는 계장인 나를 포함해 세 명이 일한다. 지방 관서에서 의뢰해 온 시료를 분석하는 게 주 업무다. 업무를 기획하거나 다른 기능과 의사 조정할 일이 크게 없다. 게다가 계원 간의 갈등도 없다. 역량을 발휘하거나 검증받을 기회는 부족할 수밖에 없다. 나는 내후년에 지방관서의 과장으로 가려고 한다. 그때는 열 명이 넘는 직원과 함께 해야 한다. 그래서 내 역량이 어느 수준인지 외부로부터 평가받아 보고 싶었다. 두 번째로는 자극이 필요했다. 본청에 있다 지방 관서에 내려온 지 8개월이 돼 간다. 그때보다는 확실히 업무가 수월하다. 그러다 보니 최근 들어서는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 같았다. 6급 역량 평가 때 시험을 풀면서 느꼈던 몰입감과 평가관의 질문을 받으면서 온몸이 경직됐던 긴장감을 다시 느껴 보고 싶었다. 그러면 자연스레 동기 부여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통과해 놓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지금은 책도 자주 읽고, 글도 꾸준히 쓴다. 보고서를 만드는 데 자신도 있다. 결정적으로 과장 직책일 때 떨어지면 직원들에게 창피할 것 같다는 시답잖은 고민도 한몫했다. "평소에 저렇게 일하더니 그럴 줄 알았다."라는 말을 들으면 비참할 것 같았다. 물론, 시험 결과로 그 사람의 역량을 온전히 평가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9월 3일 새벽 6시, 해외여행 갈 때나 쓰던 큰 가방을 밀고 집을 나섰다. 거기에는 마지막 날 입을 정장과 옷가지가 담겨 있었다. 교육 가는 날이 다가올수록 공부는 하지 않으면서 성적 걱정만 하는 학생이 돼 갔다. 역량이란 게 조금씩 내재화하는 거지 단기간에 확 끌어올릴 수 없다는 게 핑계였다. 그렇다고 아예 관심을 끈 것도 아니었다. 선배들에게 전화해서 합격 비법을 물어보고, 유튜브에 나온 영상도 살펴봤다. 보면 볼수록 내 핑계는 합리적 근거가 돼 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떨어지면 어쩌지!'와 '괜히 신청했을까!'라는 잡념이 얽히면서 걱정만 커졌다. 그러는 사이 내가 탄 차는 제시간에 맞춰 교육원에 들어서고 있었다.
강의실에는 교육생 다섯 명이 모였다. 다들 안면이 있고, 오랜만에 만나서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다들 티를 내지 않으려고는 했지만, 묘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내가 여기 왜 왔는지 모르겠다." "떨어지면 큰일인데."와 같이 이유는 달랐지만, 부담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첫 번째 수업은 서류함 기법 강의와 실습이었다. 세 개의 문제를 열다섯 쪽쯤 되는 자료를 읽고 해결해야 한다. 처음에는 문제지 넘기는 소리가, 시간이 줄수록 한숨 소리가 간간이 들렸다. 10분 같았던, 50분이 흘렀고, 나는 나도 잘 알아볼 수 없는 답안지를 써냈다. 오랜만에 몰입해서 결과물을 얻어냈다는 쾌감이 식을 무렵, 내 순서가 되어 교수님 맞은편에 앉았다. 교수님은 내 답안지를 보고 질문을 했다. 답을 어느 정도 썼다고 생각했지만, 핵심을 빗겨나갔다. 무엇이 문제인지부터 정확하게 인식해야 하는데, 답만 얻어내려는 욕심이 앞서다 보니 제대로 된 결과물이 나올 수 없었다. 그 뒤로 과 직원의 고충을 상담하는 과장 임무를 수행하는 역할 연기, 정책 보고서 초안을 작성하여 발표하는 구두 발표, 각 과를 대표해서 다른 사무관들과 협상하는 집단 토론 실습이 이뤄줬다. 실습을 마치고 나니, 합격과 불합격의 확률은 반반 같았다. 분명한 건 이번이 마지막 교육이어야 한다는 바람이 커지고 있다는 거였다.
사흘 동안 이어진 교육이 끝나고, 운영진에서 시험 진행 방법을 설명해 주었다. 그러고 나서 시험 번호를 뽑았다. 나는 4번이었다. 다행히 첫 번째 시험 과목으로 그래도 자신 있는 서류함 기법이 배정되었다. 시험날 아침, 시간에 맞춰 시험장에 올라갔다. 강의실 앞에는 4번이 큼지막하게 붙어 있었다. 먼저 책상에 놓인 인스턴트커피부터 비웠다. 잘 마시지 않던 믹스커피까지 한 잔 타 마셨다. 색깔별로 준비해 둔 형광펜을 꺼내 책상에 가지런히 놓았다. 노트북의 한글 파일을 열어 내 이름과 의미 없는 문장을 쳤다. 아홉 시 30분이 다가올수록 시계 보는 횟수는 잦아졌다. 운영 요원이 들어왔다. 문제지를 주고 50분으로 맞춰진 초시계를 누르고 강의실을 나갔다. 시간을 나눠 한 문제씩 풀어나갔다. 첫 번째 문제부터 감이 좋았다. 평소에 관심을 두었던 유기 동물 보호 사업과 관련된 내용이다. 세 문제를 다 풀었을 때 3분쯤 남았다. 만족스럽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더 잘할 자신도 없었다. 10분쯤 지나서 꽤 고집스러울 것 같고, 담배를 태울 것 같으며, 키가 180cm는 될 것 같은 60대로 보이는 남자 평가관이 자리에 앉았다. 평가관은 내가 제출한 답을 보면서 질문했다. 추가적으로 보완해야 할 점이 없냐고 물었을 때 나는 우리 시골집을 예로 들며, 유기 동물을 줄이려면 시골 어르신이 사는 집까지 방문해서 마당개를 중성화 수술해 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답변했다. 첫 번째 시험이 끝나고 합격할 수도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점심시간에는 평가업체에서 도시락을 강의실에 넣어주었다. 몰입해서 인지 허기졌고, 그래서 더 깨끗하게 비웠다. 화장실 말고는 정해진 장소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강의실을 하릴없이 놀아다니다가 책상에 팔을 개고 누웠다. 모든 평가는 네 시 30분이 넘어서야 끝이 났다.
결과는 17시쯤 나왔다. 교육에 온 목표 세 가지는 다 이뤘다. 하지만 나는 아직 과장으로서의 역량을 다 갖추었다고 자신하진 않는다. 특히나, 역할 연기처럼 부하 직원의 고충을 잘 해결해 줄 수 있을지 의문을 품고 있다. 역할 수행이 아니라 점수를 잘 받기 위해 진짜 연기를 하지 않았나 싶기 때문이다. 가끔 그런 상황이 왔을 때 방관자가 되거나 외면하려고 했었다. 이번 교육이 반성할 수 있는 기회도 되었다. 긴장과 몰입속에 보낸 교육을 마치고 회사에 돌아왔을 때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과장님에게 합격했다고 보고 했을 때 과장님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으셨다. 그다음 주에 있을 6급 역량 향상 과정에 가는 직원들에게 전화가 왔다. 어떻게 준비해야 하느냐고. 나는 말했다. 역량이란 게 단시간 공부해서 키워지는 게 아니기 때문에 내재된 실력을 잘 발휘하고, 긴장하지 않으면 합격할 수 있을 거라고. 조금 재수 없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