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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호호 Sep 21. 2024

공무원 퇴사, 스스로 선택한 걸까, 도망친 걸까?

오전에 걸려온 부재중 전화.

다시 연락이 없다.

실수로 신버튼을 터치했다는 다급한 알림도, 왜 전화를 받지 않느냐는 물음도 없으니 고민만 깊어간다.


'ㅇㅈㅇ 실장님'


끊어진 줄 알았던 인연의 실오라기.

그 실오라기를 한번 쭈-욱 당겨본다.


"여보세요?"


ㅇㅈㅇ 실장님과는 10년 전 서울의 모 초등학교 행정실에서 함께 근무했던 사이다. 승진 후 처음으로 행정실장 직위로 발령을 받아 오셨고 나는 새파란 직원이었다.


"잘 지냈지? 나 OO초로 왔어. 나이가 들었는지 자꾸 옛날 생각이 나지 뭐야. 궁금해서 전화했어. 지금 어디에서 근무해?"


매해 1월과 7월은 교육청 인사가 있는 달이다.

7월 하반기 인사에서 우리가 함께 근무했던 관내로 전보되어 오셨다고 한다.

육아휴직 후 복직하지 않고 조용한 퇴사를 했기 때문에 내가 2년 전 의원면직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요즘도 아주 때때로 명절 인사 메시지를 받고, 아주 가끔은 모 업체라며 전화가 오기도 한다. 그럴 때 나의 직함은 철 지난 행정실장님이다.


"저는 잘 지냈어요. 실장님도 잘 지내셨어요? 말씀 못 드렸는데 사실 저 그만둔 지 조금 됐어요."


"어엉? 아니 일을 그렇게 잘했으면서 그만뒀다고?!"




'일을 그렇게 잘했으면서'


칭찬의 말 한마디에 마음이 아리다.


면직 의사를 교육청 인사담당자에게 밝히고 의원면직 서류를 이메일로 주고받고, 마지막 근무했던 학교의 담당자와 기여금 따위의 일들을 마무리 짓고, 종내 면직이 완료되면서도 그동안 수고했다는 한마디 듣지 못한 채 마무리된 퇴사였다. 내가 한낱 부속품이었음을 재확인하고 그 씁쓸함에 웃음도 나고 울음도 났다.

공무원이라는 직업이 내게서 도려내진 첫날, 남편은 케이크를 사 왔다. 남편과 어린 두 아들이 내 14년 공직 생활의 수고를 위로해 주었다. 시원 섭섭 알쏭달쏭한 기분을 눈물 몇 방울에 씻겨 보냈다.


"직원으로는 잘했던 것 같은데, 실장으로서는 제가 일을 잘 못하더라고요."


솔직한 고백을 했다.

똘똘했던 부하직원은 어느 초등학교의 행정실장이 되고는 영 물러터진 관리자로 변모했다.

말이 관리자이지 실제로는 직원들보다도 담당 업무가 많았다.

경력과 나이가 나보다 훨씬 많은 직원들의 관리자가 되기에 나는 많이 물렁했고 부족했다.

책임은 다양하고 무거웠다.


버거운 속내를 가면 안에 잘 숨겨두고 웃는 얼굴로 출근과 퇴근을 반복했다.

하지만 나는 내내 큰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날만을 손꼽고 있었다.

휴직의 떳떳한 이유.

그때까지만 해도 육아휴직은 일종의 도피처였지 퇴사로 가는 길은 아니었다.

1학년이 되는 아이를 챙기며 휴식을 취하고 1년 후 다시 돌아갈 것으로만 생각했다.

아이가 1학년이 되었고 수순처럼 육아휴직에 들어갔다.

시간은 잘도 흘러 아이는 2학년이 되었고 육아휴직은 예상보다 1년이 길어졌다.

그리고.

결국 복직하지 않았다.


과연 나는 퇴사를 스스로 선택한 걸까. 도망친 걸까.

가끔씩 우울해지곤 했다.


자발적인 것이든 등 떠밀린 것이든 나는 불안을 처리하고 싶어 공직으로 되돌아가는 길을 차단했다.

생각해보니 어폐가 있다.

도망치는 것도 하나의 선택이니까.

공무원 밖의 세상이 마냥 낙원은 아니다.

처리된 불안대신 또 다른 불안을 얻었다.

불안 없는 삶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견딜 수 없는 불안과 견딜 수 있는 불안 사이에서 나를 지키는 선택을 했다고 생각한다.


급한 불을 껐다.




"아.. 일을 진짜 너무 잘했는데..  너무 아깝다.. 난 자기를 커리어우먼이라고 생각했는데.."


"제가요?"


실장님은 내가 생각하는 나와는 참 다른 모습으로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행정실 동료들과 적당히 사무적인 관계를 맺으며 나쁘지 않은 개인주의자로 지냈다고 기억한다.

실장님은, 나를 행정실 조직에 잘 섞이고 동료들과 관계 맺기를 잘했던 후배로 기억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나보다 나를 더 유능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계셨다.


이런저런 이야기와 일상을 나누고 다음에 만날 것을 기약하며 전화를 끊었다.


갑자기 걸려온 뜻밖의 전화. 어쩐지 동떨어지게 느껴지는 과거 나에 관한 타인의 기억.

처음엔 내가 생각하는 내가 실체라고 생각했다.

실장님이 기억하는 나는 잘 포장한 '사회적인 나'라고.

그러다 문득 생각한다.


'나는 나에 대해 과연 얼마나 알고 있는 걸까?'


실장님이 기억하는 '나'도 '나'라는 결론에 이른다.

내 몸이 내 것인지라 주인인 내가 나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믿었지만,

어쩌면 나는 스스로를 실제보다 늘 부족한 사람으로 여기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스스로를 작은 존재로 여기지 않았다면 나는 아직 공무원이었을까?'

후회가 담긴 가정은 아니다.

 

나를 괴롭히던 불안에서 벗어나 대체로 평안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으니 족하다.

60살까지 같은 직업으로 살아갈뻔한 내가 새로운 직업을 갖게 되었고,

또 다른 새로운 일과 직업을 상상하고 계획할 힘도 생겼다.

손에 쥔 떡을 내려놓으니 다른 떡을 집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내가 생각했던 나보다 사실은 조금 더 괜찮은 사람'이라는 자각을 얻었다.

내가 부재중전화를 부재중으로 남겨놓지 않는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공무원인 것이 싫어 의원면직을 선택했다.

크고 작은 선택들이 모여 인생의 차트를 만들고 나를 나이게 만든다.




초등 4학년 친구들 수업에서 새옹지마를 가르친다.

나의 경험을 담는다.

인생에서 만날 여러 어려움들이 너희의 끝이 아님을, 나락이란 없음을 말해준다.

말을 떠나보낸 새옹이 지금의 나일까?

인생사 새옹지마다.

굴곡 없는 삶을 바라지만 끝없이 올라만 가는 삶도 한없이 내려만 가는 삶도 없다.

공무원이 아닌 선생님인 나는 아이들과 수업하며 새옹지마를 배우고 함께 자란다.

새옹의 말이 또 다른 식솔을 끌고 나에게 올 것을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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