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땅에서 만난 진짜 어른
"한국에 계신 부모님께서 딸을 돌보시듯이, 여기서는 제가 이 선생님의 미국 엄마가 되어주겠어요."
낯선 땅에서 들은 이 말 한마디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그 따뜻한 약속을 해준 사람은 다름 아닌, 내 첫 직장의 교장 선생님이었다.
"직장에서 누구와 일하느냐"는 직업 만족도를 좌우하는 아주 중요한 요소다. 교사라는 직업은 학교의 특성상 팀보다 개인의 공간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지만, 함께 일하는 리더가 누구인지에 따라 학교 생활의 결은 완전히 달라진다.
내가 미국 공립학교에 처음 채용되었을 때, 나를 인터뷰하고 채용 결정을 내린 교장 선생님의 이름은 Mrs. Adesegun이었다. 세 시간에 걸쳐 찾아갔던 학교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나는 한 치의 꾸밈도 없이, 진심을 담아 나의 이야기를 전했고, 그녀는 그 진심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놀랍게도 바로 다음 날, 그녀는 카운티 교육청 HR에 직접 이메일을 보내 내 채용을 강력히 요청했고, 나를 참조인으로 포함시켜 관련 절차를 신속히 진행해 주었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이분과 함께라면, 단지 교사로서가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도 성장할 수 있겠구나.
그분은 키가 크고 단정한 정장을 입은, 카리스마 넘치는 흑인 여성 교장 선생님이었다. 학교 전체 회의나 집회에서 마이크를 잡으면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장악할 만큼 존재감이 컸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마주할 때면 언제나 부드러운 미소와 따뜻한 말투로 나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셨다.
강인함과 따뜻함을 동시에 지닌 모습. 그 이미지는 지금도 내 마음속에 깊이 각인돼 있다.
젊고 어설픈 외국인 교사에게 기적 같은 기회를 건네준 그분. 그분이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의 내가 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어느 날, 한국에서 부모님이 메릴랜드를 방문하셨을 때였다. 학교를 보여드리고 싶어 조심스럽게 여쭈었더니, 교장 선생님은 흔쾌히 허락해 주셨다.
그날, 학교 현관 앞에서 밝은 미소로 부모님을 직접 맞이해 주신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교장실로 부모님을 따로 모시고 간 그녀는, 한국식으로 정중히 인사를 건넨 뒤 천천히, 또박또박 이렇게 말씀하셨다.
“Ms. OOO is doing a wonderful job.
You don't need to worry.
In Korea, she has her parents.
But here in America, I'm her American mom.
I'll take good care of her.”
그리고는 엄마와 아빠를 따뜻하게 안아주셨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분은 단지 상사가 아니 정말로 나를 돌봐주려는 어른이자 이방 땅의 보호자라는 것을.
그날 이후 미국에서의 삶이 항상 순탄했던 건 아니었다. 새로운 동료들과의 관계, 낯선 교육 시스템에 적응하는 일, 그리고 이방인으로서 느끼는 크고 작은 외로움들.
하지만 힘든 순간마다 떠오르는 게 있었다. 교장실에서 들려온 그 목소리, 부모님을 안아주던 그 따뜻한 모습. "너는 혼자가 아니야"라고 속삭여주는 것만 같았다.
그 믿음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무너질 뻔한 순간들을 견뎌낼 수 있었고, 다시 일상을 이어갈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지금도 가끔 힘든 일이 있을 때면, 그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교장실에서 울려 퍼졌던 따뜻한 목소리, 부모님을 안아주시던 그 순간의 따스함을.
진짜 리더십은 권위로 사람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것.
나는 그분을 통해 그것을 배웠다.
그리고 언젠가 나도, 누군가에게 그 사람만의 ‘직장 엄마’, 아니 든든한 어른이 되어주고 싶다는 꿈을 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