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학교에서 뜻밖의 교장직 제안

아이들과의 하루가 전부였던 나, 제안을 마주하다

by Hannah

커피 잔 속 김이 천천히 흩어졌다. 책상 위에는 지원서와 줄 그어진 이력서가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귀국한 지 두 달, 서른셋의 나는 다시 교사의 길을 찾고 있었다.

미국에서 보낸 4년간의 교사 생활. 초등학교 교실에서 나는 매일 아이들의 작은 기적을 목격했다.

서툰 발음으로 첫 문장을 읽어 내려가던 순간,

낯선 나라에서 친구에게 처음 건넨 “Can I play with you?”라는 한 마디,

그리고 아이를 한 명의 인격체로 존중하는 교육 철학.

그 모든 장면이 아직도 선명했다.
이제 그 배움을 한국에서도 이어가고 싶었다.

현실적인 무대는 국제학교였다. 영어로 수업하는 환경에서 미국식 교수법을 펼칠 수 있으니까.

이력서를 다듬어 여러 학교에 지원했고, 면접을 마치고 나면 메일 알림음 하나에도 심장이 두 번은 뛰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싱가포르 국제학교에서 인터뷰를 본 바로 다음 날 연락이 왔다.

“저희 학교에서 Literacy Coordinator로 함께 일하실 의향이 있으신가요?”


새로운 출발

그 학교는 싱가포르에 본부를 둔, 아시아 전역에 80여 개 캠퍼스를 둔 대형 교육 그룹이었다. 영어 몰입 교육과 창의적 탐구 중심 수업으로 유명했고, 한국 캠퍼스는 집에서 멀지 않았다.
무엇보다 ‘Literacy Coordinator’라는 직책이 마음을 끌었다. 아이들의 읽기와 쓰기를 전반적으로 이끄는 자리라니.


첫 출근 날, 빨간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밝게 외쳤다. “Good morning, Teacher!”

교실 벽은 아이들의 그림과 프로젝트로 가득 차 있었다. 작은 손이 붙인 색종이 작품 옆에는, 어제 만든 과학 실험 사진이 빛나고 있었다. 다양한 국적의 교사들이 아이들과 어울려 웃고, 영어와 중국어, 그리고 여러 언어가 공존하는 활기찬 공간이었다.

학교의 교육 철학은 ‘레지오 에밀리아 접근법’. 아이를 잠재력 있는 존재로 보고, 탐구와 발견을 통해 배우도록 돕는 방식이었다.


내 역할은 아이들의 언어 능력을 균형 있게 키우는 프로그램을 설계하고, 초임 교사부터 베테랑 교사까지 멘토링하고 코칭하는 일이었다. 미국에서의 경험이 빛을 발했다.

교사들은 내가 여는 워크숍을 반겼고, 수업 참관 후에는 “다음엔 이런 방법도 시도해 보고 싶어요”라며 아이디어를 나눴다.
아이들의 영어 읽기, 쓰기 실력은 서서히, 그러나 분명히 자라고 있었다. 매일이 바빴지만, 하루 끝에 남는 성취감은 달콤했다. ‘이거다. 내가 찾던 바로 그 일이야.’


도서관의 부활

그 무렵, 오래 방치되어 있던 학교 도서관 개선 프로젝트를 맡게 됐다.

공간은 좁고 예산도 빠듯했지만, 각 연령·수준·프로젝트 주제에 맞는 책을 찾아내는 일에 온 힘을 쏟았다.

발로 뛰어 저렴하고 좋은 책을 공급해줄 업체를 찾고, 새로 들여온 책을 직접 분류하고 라벨을 붙였다.
대출·반납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도 직접 만들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 책 한 권 한 권을 손에 들고 먼지를 털고, 이름표를 붙이고, 선반에 꽂았다.
그렇게 도서관은 조금씩,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때의 성실함과 실행력을 이사장님은 눈여겨보셨을 것이다.


예상치 못한 제안

두 달쯤 지났을 무렵, 이사장님이 나를 불렀다. 조용한 회의실, 테이블 위로 따뜻한 커피 향이 스며들었다.

“선생님이라면 잘하실 것 같아요. 교장 자리에 도전해 보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교장? 나를?

아직 배울 게 많았다. 리더십 경험도, 나이도, 자신감도 충분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교실에서 아이들과 웃고 떠드는 시간이 가장 소중했다.
그 자리는 내 꿈의 목록에 없었다.

망설이는 나에게 이사장님은 말했다. “결정을 서두르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맡게 된다면 많은 배움의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가을의 갈림길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가을바람이 서늘하게 뺨을 스쳤다. 가로수 사이로 붉고 노란 잎이 천천히 흩날렸다.

‘왜 바로 거절하지 못했을까?’

‘혹시 내가 모르는 가능성이 있는 걸까?’

누군가 내 안에서 ‘리더’를 보았다면 그 이유가 궁금했다.

그날 이후, 내 안에 작은 물결이 일었다. 그리고 한 가지 질문이 남았다.

“나는 지금도 교사일까, 아니면 누군가의 리더가 될 사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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