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아가사 크리스티 여사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다시 읽었습니다. 초등학생 때 읽었을 때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지금 읽으니 왜 아가사 크리스티 여사의 이름이 이렇게 드높은지, 왜 이 소설이 명작이라 불리는지 감탄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이 소설이 이후 콘텐츠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간단하게 몇가지를 소개해볼까 합니다.
애가사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이 소설은 1939년에 쓰여졌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거의 80년전에 쓰여진 책입니다. 80년동안 이 책의 주요 소재들과 트릭, 캐릭터들은 알게 모르게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이 책을 보고 '그냥 그렇네'라고 생각했던 가장 큰 이유는 그 긴 시간동안 많은 다른 콘텐츠에서 활용되어 익숙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찾을 수 있는 첫 국내 소개작은 1989년도에 일신출판사에서 김은정씨가 번역한 책이었습니다. 국내에서도 이후로 계속해서 번역되며 32년간 무수히 읽힌 책이라는 뜻입니다.
저는 이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을 3가지라고 생각합니다. 1.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으로부터 초대, 2. 심판받지 않은 죄인들이 외딴 섬에 갇힘, 3. 동요와 인형의 존재입니다.
1.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으로부터 초대
여기서 중요한 점은 2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초대를 받는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먼저 초대를 받는다는 것은 안전하고 일상적인 공간과 시간에서 위험하고 비일상적인 공간과 시간으로 이동하는 계기가 됩니다. 공간과 시간의 변화는 사건의 시작입니다. 조셉 캠벨이 말하는 소명의 부름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초대자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에서 등장인물들을 초대한 사람은 율릭 노먼 오언과 유나 낸시 오언이라는 부부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이니셜은 U.N.Owen(오언)입니다. 그리고 이 이름의 발음은 언노언. 즉, 정체불명을 뜻하는 Unknown(언노운)의 에너그램입니다. 따라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로부터 초대를 받았다는 것이며, 초대의 목적이 불분명하다는 뜻이 됩니다. 초대자가 누구인가에 따라서 초대의 목적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친구에게 초대를 받았으면 이 친구가 결혼을 하는지, 아니면 집을 사서 집들이 초대인지 등 친구의 사정에 따라서 초대의 목적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초대하는 호스트가 Unknown이라는 점에서 초대장의 목적이 무엇이든 그 초대의 목적은 알 수 없게 됩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애너그램 등을 활용하여 클로즈드 서클로 초대하는 이러한 소재는 이후 추리물의 클리셰로 정립됩니다. 가장 많이 알려진 콘텐츠는 소년탐정 김정일의 「밀랍인형성 살인사건 편」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해당 편에서 등장인물들은 Mr. 레드럼이라는 인물에 초대를 받아서 밀랍인형성으로 오게 됩니다. 이 레드럼이란 이름을 영어로 풀면 Redrum이고, 이 글자 순서를 거꾸로 하면 Murder 즉, 살인이 됩니다. 이 편은 아래에서 설명할 인디언 인형과 밀랍인형과의 비유적 유사성 등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2. 심판받지 않은 죄인들이 외딴 섬에 갇힘
지금은 정말 흔하게 쓰이는 소재이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사실 굉장히 효과적일 수밖에 없는 기법입니다. 먼저 외딴 섬에 갇혀 있기 때문에 줄 수 있는 긴장감이 있습니다. SF영화 <팬도럼>, <라이프> 등에서 우주 한복판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이 등장인물들을 노릴 때, 우주선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긴장감이 느껴질 수밖에 없듯이 외딴 섬이 주는 도망갈 수 없다는 공간적 한계가 주는 긴장감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도망갈 수 없는 한정된 공간에 있는 모든 사람은 이전에 죄를 지었던 죄인입니다. 그리고 죄를 짓고도 심판받지 않을만큼 영악하고 교활한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누구도 들어올 수도 나갈 수도 없는 한정된 공간에서 죄인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 누가 누군가에게 살해당합니다. 이것은 공간적 한계가 주는 긴장감을 배가합니다. 이전에 죄, 그것도 그 죄가 살인이라면 조건이 갖추어진다면 다시 죄를 지을 수 있다는 추론이 가능해지면서 모든 인물들을 의심할 수밖에 없고, 누가 범인이라도 가능할 당위성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스릴러적 긴장감외에 두 가지 특별한 효과를 더할 수도 있습니다. 첫번째 효과는 과연 등장인물들 중에서 무고한 사람은 없을까하는 의문입니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은 3인칭 시점의 소설입니다. 이들의 죄는 초대자인 오언이 녹음해놓은 목소리로 제시됩니다. 이들이 진실로 죄를 지었는지 아닌지는 본인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단지 이들의 회상 등을 바탕으로 유추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할 뿐입니다. 그리고 이들 외에는 인디언 섬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고, 죄의 댓가로 살해한다는 초대자 오언의 전제에 따르면 이들 중에 무죄인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곧 범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은 범인을 찾으면서 무죄인 사람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두번째 효과는 소위 말하는 사이다 효과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논리로 당위성을 따질 일이 아닙니다. 그저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그 당연한 일이 현실에서도 소설에서도 흔히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권선징악이 처절하게 이루어질 때 독자는 카타르시스를 느낍니다.
죄를 지은 사람들을 일정한 공간에 가두어 놓고 하나하나 죽여가며 댓가를 치르게 한다는 소재는 최근에는 추리게임에 자주 사용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아쉽게도 지금은 단종된 <검은방> 시리즈입니다. <검은방> 시리즈는 한정된 공간에 과거 어떠한 사건으로 누군가를 희생시켰거나, 누군가의 희생에 관여되어 있거나, 누군가의 희생으로 수혜를 받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연쇄사건이 벌어지는 배경을 가지고 있는 스토리형 방탈출 모바일 게임입니다. <검은방>에서는 흔히 '선을 넘다'는 표현을 많이 씁니다. 인간으로서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지켜야 할 양심과 규율을 저버리는 행위에 대한 표현입니다. 즉, 죄인들이죠. 적어도 초대자(범인)가 생각할 때 <검은방>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가 죄인입니다. 그리고 초대자(범인)는 죄인들을 차근차근 죽여나갑니다.
<검은방>은 분명히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은 게임입니다. 그렇지만 게임의 특징상 게이머가 움직여야 할 메인캐릭터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1인칭 시점이 될 수밖에 없다는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소설에서는 제 3자로서 관조하는 입장이 되지만 게임에서는 류태현이라는 주인공의 역할인 탐정이 되어서 사건을 직접 해결해야 합니다.
3. 동요와 인형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의 가장 인상적인 장치는 뭐니해도 열명의 인디언 소년에 대한 동요와 열 개의 인디언 인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는 각각 범행 수법과 등장인물들을 나태냅니다. 먼저 열 명의 인디언 소년에 대한 동요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열 명의 인디언 소년에 대한 동요는 처음의 열 명의 인디언 소년들이 각자 다른 이유로 한 명씩 사라지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범인은 이 인디언 소년들이 사라지는 이유를 범행 수법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각자의 방에 처음 들어갔을 때 이 열명의 인디언 소년에 대한 동요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 동요를 이미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등장인물들에게 이 동요는 사실상 이후 벌어질 범행 내용에 대한 예언과 다를 바 없습니다. 따라서 이 동요는 등장인물들에게는 공포가 되고, 독자에게는 긴장감과 동시에 다음에는 어떤 범행 수법으로 동요의 이유를 매치시킬까라는 궁금증을 자아냅니다. 왜냐하면 동요에서 인디언 소년들이 사라지는 이유는 비유적이며 살인이라는 범행과 정확히 매칭이 안 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동요가 예언이라면 인형은 현황판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인형은 등장인물입니다. 처음 등장인물들이 도착했을 때 그리고 한 명이 살해당할 때마다 아무도 모르게 인형이 하나씩 없어집니다. 따라서 인형은 남은 인원을 알려주는 현황판임과 동시에 누군가가 살해당했다고 알려주는 뉴스 속보입니다. 등장인물들은 하나씩 사라지는 인형을 보면서 공포를 느낍니다. 왜냐하면 열 개의 인형이 하나씩 사라질 때마다 점차 자신의 목을 조여오는 것 같은 초조감과 긴장감을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독자들은 양가적인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아무도 드나들 수 없는 공간에 그들만이 있는 게 확실하다면 논리적으로 그들 중에 범인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마지막에 남을 인형은 범인을 상징하는 인형 하나여야 합니다. 하지만 주인이 누군지도 모르게 세팅되어 있는 외딴 섬, 아무도 모르는 비밀을 준엄하게 폭로하는 목소리, 누구도 눈치 못채게 죽어가는 사람들과 사라지는 인형들을 보고 있으면 과연 범인이 저 등장인물 중에서 있긴 한걸까라는 생각도 얼핏 듭니다. 어쩌면 초자연적인 존재 또는 힘이 이들을 심판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도 드는 겁니다. 특히 마지막 남은 1인이 살해될 때 그 생각은 보다 깊어집니다. 그 정황은 스포금지를 위해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독자는 추리소설을 읽을 때의 흥미로움과 호러 소설을 읽을 때의 오싹함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고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소재를 가장 잘 활용한 콘텐츠는 제 생각에 <무한도전>의 '세븐 특집'입니다. 파티에 초대받은 무한도전의 멤버들, 정체 모를 초대자의 준엄한 호통, 갇혀버린 공간과 7개의 멤버들의 인형, 본인들의 언행 때문에 사라져가는 멤버들과 피를 흘리는 사라진 멤버들의 인형, 흥미로움 속에서 오싹한 분위기와 엔딩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는 제작진의 멘트 등 특집 전체에서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의 영향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 세 가지의 소재를 중심으로 각 소재가 주는 효과와 그 소재를 활용한 대표적인 콘텐츠에 대해서 간단하게 논하였습니다. 제가 여기서 논한 건 그야말로 이 글을 쓰면서 생각난 몇 가지를 언급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라는 소설은 말그대로 추리소설의 고전입니다. 또한, 오랜 세월동안 꾸준히 읽혀왔고, 그 읽은 사람들이 이 소설에 영감을 받아 나름대로 콘텐츠를 만들어 왔습니다. 그래서 현재 많은 콘텐츠들이 알게 모르게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라는 소설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가끔은 이런 고전을 하나 읽고 주변의 새로운 콘텐츠들에서 위대한 고전의 발자취를 찾아보는 것도 즐거운 독서의 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