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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달장애 아들의 발달

희망을 갖고 한 걸음씩

2017년, 아들이 발달장애 진단을 받았을 때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알지 못했다. 발달장애에 대한 지식도 부족했고, 아들이 어떤 유형인지 단번에 파악하기도 어려웠다. 의사와 지역 센터의 전문가를 찾아갔지만, 뚜렷한 해답은 들을 수 없었다.

그저 “노력하면 조금은 좋아지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만 품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서야 알았다. 발달장애는 완치되는 것이 아니라, 평생 함께 안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절망적인 진실만은 아니었다. 하나뿐인 아들이기에, 어떤 모습으로 태어났든 부모에게는 특별한 존재다. 다른 아이들과 조금 다르다고 해서 그 특별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중요한 건 어제보다 조금 더 나은 내일을 함께 희망하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 나는 양육에 거의 손을 댈 수 없었다. 매일 이어지는 회의, 주말에도 멈추지 않는 보고 자료 작성…. 회사는 마치 외줄 타기와 같았고, 한 번 놓치면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만 같았다. “열심히 일해 성취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결국 아들에게 힘이 되리라” 믿었다.

아들은 어린이집에서도, 초등학교에 입학해서도 특수반에 배치되었다. 하교 후에는 센터를 전전하며 각종 치료를 받았다. 우리는 수소문 끝에 전문가를 찾고, 예약하고, 기다린 끝에 테라피를 받게 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 생활이 몇 년간 이어지자 아내는 지쳐갔고, 부부싸움도 잦아졌다.

나는 아이보다 회사와 생계를 우선했다. 업무 분위기상 “오늘 아들이 치료가 있어 일찍 퇴근하겠습니다”라는 말조차 꺼낼 수 없었다. 회사라는 거대한 존재는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그건 네 문제일 뿐이야. 성인이라면 스스로 감당해. 여기서는 회사 일이 우선이야.”

그런 분위기 속에서 수많은 직장인들이 가족을 뒤로한 채 정년까지 버티며 살아간다. 중년의 삶이 회사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은 부당한 일이지만, 나는 그 속에 휩쓸려 있었다.


미국에 와서 아들은 초등학교 1학년에 다시 입학했다. 그러나 처음 배치된 곳은 증상이 가장 심한 아이들이 모인 Self-Contained Class였다. 아들은 음악, 수학, 리딩까지 가능한 고기능 자폐였음에도, 예산 부족을 이유로 일반 학급에 들어가지 못했다. 아내는 크게 낙담했지만, 나는 새로운 근무지에 적응하느라 더 무거운 짐을 안고 있었고, 여전히 가정에는 충분히 손을 쓰지 못했다.

결국 아내의 제안대로 우리는 보증금을 포기하고 외곽의 다른 동네로 이사했다. 다행히 새 학교에서는 상황이 달라졌다. 선생님들과 스태프들의 도움 속에서 아들은 점점 성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오케스트라에서 첼로를 연주했고, 영어로도 선생님들과 자연스레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은 수학에 흥미를 붙이며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앞날에 무슨 일이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의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내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에서 센터를 전전하던 시절 아들은 큰 진전을 보이지 못했지만, 지금은 열린 환경에서 흥미와 소질을 따라 성장하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사람마다, 상황마다 어떤 방식이 더 맞는지는 다르다. 하지만 미국에 와서 확실히 달라진 점은, “가족이 우선”이라는 사회적 통념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손길이 필요한 아이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

나는 발달장애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들이 아이를 더 잘 돌볼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이 더 많이 마련되기를 바란다. 그것이 우리 아이들의 내일을 조금 더 특별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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