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게도 완벽한 부모님을 주실래요?
『완벽한 아이 팔아요』
미카엘에스코피에 글, 마티외 모데 그림, 박선주 옮김/ 길벗스쿨/ 2017
‘완벽함’이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해 본다. 적어도 나에겐 추구하는 듯하면서도 또 멀리하고픈 모순을 가진 그런 표현이다. 어릴 적부터 완벽주의적 성향이 강한 나였다. 1남 4녀의 가족관계 속에서 무엇이든 잘 해내야 한다는 생각이 강박처럼 늘 자리하고 있었다. 물론 이런 마음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항상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고 항상 조금 더 나아지려고 노력하며 살았던 듯하다. 이런 삶의 태도를 후회해 본 적은 없지만 아이를 낳고 키우며 시선을 조금 바꿔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지나친 연습을 했었고, 스스로 부족하다 생각되는 일은 시작도 하지 않았고, 어떤 일을 하고 난 뒤엔 작은 성취에 대한 칭찬보다는 언제나 개선해야 할 점들만이 숙제처럼 남아 있었다. 잘한 점보다는 부족한 나를 찾고 있는 나를 보았고 이런 나의 삶의 태도는 아이를 키우면서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너무나 예쁘고 사랑스럽고 흠잡을 곳 없는 아이인데 그 안에서 또 부족한 무언가를 찾고 있으니 말이다. 나에게 완벽함은 추구하는 대상이기도 하지만 현실에서 부딪히는 벽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적어도 내 삶 안에서는 그랬다.
이런 내가 어느 날 부모가 되었다. 연습도 공부도 없이 부모가 되어 아이와 똑같은 나이를 먹어가는 둣 했고 “나도 엄마가 처음이라 미안하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해가면서도 나의 방식대로 나의 기준대로 키우고 있었다. 아이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 상황에서는 어른인 나의 주관이나 가치관이 상황을 해결하는데 아주 크게 작용한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인데 어릴 적 그 당시엔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했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현실에서 부딪혀 가며 터득해 왔다. 그러면서 내가 가진, 아니 우리 부부가 가진 가치관들을 돌아보고 보완해야 할 점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완벽한 아이 팔아요>는 이런 내가 혹 할 만한 제목이었다. 완벽한 아이라… 내가 꿈꾸던 완벽한 아이. 쇼핑카트에 타고 있는 아이 모습의 표지는 아이를 키우면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그리고 첫 장을 넘기면 부부가 손잡고 미소 지으며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 하지만 이야기의 시작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우리나라 1등 아이할인점, 아이마트”“5명 구입 시 무료배송”뒤프레 부부는 완벽한 아이를 사기 위해 마트에 간다. 그것도 완벽한 아이를 말이다. 3학년 아이들이 듣기에도 다소 놀라운 설정인지 책을 읽기 시작할 땐 시끌벅적하다가 첫 페이지를 다 읽기도 전에 조용해졌다. 마트엔 여러 모델의 아이들이 전시되어 있다. 음악 특기생, 타고난 천재, 알뜰코너 쌍둥이 등등. “저희는 완벽한 아이를 찾는데요” “재고를 확인해 보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워낙 인기 있는 모델이어서요” 뒤프레 부부는 하나 남은 완벽한 아이 바티스트를 구매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이렇게 해서 바티스트는 뒤프레 부부의 가족이 되었다.
바티스트는 그야말로 완벽한 아이이다. 단 것은 이에 좋지 않으니 먹지 않고, 반찬투정 없이 밥도 혼자 잘 먹고, 얌전히 혼자 잘 놀고, 잠도 잘 자며 전 과목 공부도 잘한다. 부모의 작은 실수쯤이야 웃으며 넘어가는 완벽한 아이 바티스트. “저게 가능해~~?” “우와~~ 머야~~” 특히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남자아이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부모들이 바라는, 아니 나와 뒤프레 부부가 바라는 완벽한 아이의 모습이다. 글을 통해 바티스트의 완벽한 모습을 보여 주지만 무엇인가 이상하다. 아이의 완벽함 뒤에 어설픈 부모의 행동들이 교실이 아이들 눈에도 거슬렸던 걸까? 아이답지 않은 모습의 바티스트에게 교실의 아이들 또한 묘한 이질감과 그림 속 뒤프레 부부의 모습에 화가 나기도 하는 모습이었다. 하교 후 데리러 오는 것을 깜박한 아빠에게 “괜찮아요, 아빠 덕분에 숫자를 13752까지 셌는걸요.” 냉장고가 비어 먹을 것이 없는 엄마에게 “밥은 내일 먹으면 되죠, 뭐”라고 말해주는 바티스트. 뒤프레 부부가 꿈꾸던 완벽한 아이였다. 어설픈 부모와 완벽한 아이 바티스트. 아슬아슬한 삶을 이어가던 중 일이 벌어진다. 늦잠을 잔 부모를 깨워 등교하는 바티스트에게 엄마는 오늘이 축제일이니 축제의상인 꿀벌 의상과 더듬이까지 완벽히 준비시킨다. 조용한 교실에 들어선 바티스트. 얼음이 되어버렸다. 더듬이 윙윙 소리는 더 크게 들렸을 것이고 놀란 선생님과 웃고 있는 친구들에 바티스트의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바티스트는 그 순간 쇼를 하듯 재미있게 그 상황을 넘길 수 없었을 것이다. 얼마나 속상하고 부끄럽고 숨고 싶었을까... 심지어 그날은 축제날도 아니고 단체사진을 찍는 날이었다. 부부의 실수로 인해 바티스트가 결국 화를 내는 상황이 벌어지고 뒤프레 부부는 수리를 요청하기 위해 세차게 내리는 비를 뚫고 아이 마트로 향한다. 이런 아이가 아니었는데 이상해졌다며 고쳐달라고 한다.
심플하게 표현한 그림과 글들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얘들아~~ 완벽하다는 게 뭘까? ”“.............” “어렵지??... 그럼 아이답다는 건 뭘까?” “아이는 실수할 수 있어요.” “많~~ 이 많~~ 이 놀고 싶어요.” “엄마랑 같이 자고 싶어요.” “그런데 바티스트 부모님은 너무한 거 아니에요?? 이제야 긴장감에서 해소된 듯 하나둘 이야기를 시작한다. 아이답다는 것, 또 부모답다는 것에 대해 아이들과 더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표현하고 싶은 말이 많은 아이들에게 15분이라는 시간은 너무나 아쉬울 뿐이었다.
두 아이의 부모로서 많은 생각을 하게 했던 책이다. 백지에 하나하나 그려서 그림을 완성하듯 아이들도 그렇게 하나하나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완벽한 아이. 어릴 때부터 좋은 습관을 들이고 루틴화하면 그렇게 자랄 수 있을 것이라는 오만한 생각을 했었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우리 집 큰아이가 태어나고 나는 아이에게 많은 것을 강요했다. 밥 먹을 때 흘리지 않기, 차 안에서 가만히 있기, 성급하게 뛰지 않기, 책 보고 정리하기, 옷은 한 곳에 두기 등등. 큰아이는 내가 이야기하는 대로 해주는 아이였다. 재미있기도 했고 미래에 대한 기대도 컸다. 아이의 힘듦보다는 나의 생각과 욕심이 더 컸었다. 하지만 둘째는 달랐다. 이래서 아이 둘은 낳아봐야 육아에 대해 쉽게 말하지 못한다고 했던가··· 모든 것을 직접 경험해 보아야 하고 조심성이라고는 조금도 없을뿐더러 엄마와 오빠를 믿지 못해 본인 앞에 밥이 있어도 오빠 것을 먹어봐야 하는 아이였다. 얼마나 넘어지는지 무릎은 멀쩡할 날이 없었고 ‘저러다가 떨어지겠네···’하고 생각하는 순간 일이 벌어지고 마는, 상상을 현실화하는 그런 말괄량이 동생이었다. 차곡차곡 루틴을 만들어가고 있던 난 살면서 이런 험난함을 처음 경험하는 듯했다. 너무나 귀엽고 사랑스럽지만, 그것과의 별개의 어려움이었다. 문제는 따로 있었다. 천방지축 동생을 보며 큰아이도 용기를 내기 시작했다. 안된다고 생각했고 안 되는 줄 알았던 것들을 동생이 하는 것을 보면서 큰 아이가 해 보는 것이다. 우와.. 미칠 노릇이 아닌가·· 이렇게 전혀 다른 성격의 두 아이의 유년기를 보내면서 가장 많은 변화를 한건 나였다. 아이에 대한 교육관, 나의 인생관 자체가 바뀌었다. 그리고 나에게 두 아이가 있음에 감사한다. 우리 가족의 구성원인 두 아이가 서로 보완해 가며 성장해 가고 있음이 보인다. 초등고학년, 중학생이 된 아이들이 서로의 성향을 알고 지지해 준다. 배워보고 싶지만 겁이 많은 오빠가 동생이 하는 것을 보고 용기를 내고, 여전히 말괄량이 동생은 의젓한 오빠에게 의견을 묻고 상담한다.
‘아이답다는 것’ 아이이기에 실수할 수 있고 아이이기에 서툴 수 있음이 당연한 것이었다. 어쩌면 내가 부딪히며 세상을 알아가는 아이의 특권을 빼앗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실패도 해보고 다쳐도 보고 그 안에서 방법을 찾을 수 있도록 아이들과 이야기한다. 지금은 어떤 경험을 하다 안 되더라도 뒤에서 지켜보고 이끌어줄 부모가 있으니 이때에 많은 것을 해보길 이야기한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것인데 나의 기준의 완벽함을 강요했었다.
이제는 완벽함의 기준을 다르게 둘 수 있을 것 같다. 일률적이고 획일화된 타인이 세운 기준이 아니라 내가 중심이 되는 완벽함으로 말이다. 각각이 다른 개인들이 그들의 고유함을 가지고 팀을 이룰 때 그때서야 비로소 다른 의미의 완벽한 팀, 사회가 되어가는 게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우리 집 두 아이가 작은 팀워크를 이루어가듯이. 그림책 속 그림 안의 뒤프레 부부의 모습을 보면서 나의 행동들도 돌아보게 되었다. “저에게도 완벽한 부모님을 찾아줄 수 있나요?”라는 마지막 바티스트의 말이 마음속에 오래 남았다. 뒷 면지 속 세 가족이 솜사탕을 먹으며 걸어가는 모습에 눈이 오래 머물렀다. 단 것은 이에 좋지 않으니 먹지 않겠다던 바티스트가 변한 것일까 완벽한 아이를 찾던 뒤프레 부부가 변한 것일까.
<함께 보면 좋을 책>
-앙통의 완벽한 수박밭_코린 로브라 비탈리 글_마리옹 뒤발 그림_이하나 옮김
-완벽한 계란후라이 주세요_보람 글그림
-페인트_이희영 장편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