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아버지가 썸을 타고 있다

바람인 듯, 사랑인 듯 혹은 다리를 분지르는 일

by 이손끝

아버지가 썸을 타고 있다.

노래를 잘 부른다는 그녀와 영화도 보고 콜라텍도 가고 밥도 먹고 차도 마셨다.

엄마와는 다르게 화려하게 꾸미기를 좋아하고 놀러 다니기를 좋아하는 그녀와

어디든 가볼 모양으로 룰루랄라 아버지의 바깥 외출이 시작됐다.


엄마는 눈에 다 보이는 게 웃긴다면서 내버려 두라고 하고,

언니는 이제 그만 아버지를 보내주라고 농담한다.

나는 아버지든 누구든 다리를 분질러야 한다고 했다.





나의 두 번째 아버지.

엄마가 아버지와 같이 살기 시작한 지 10년이 넘었다.


여러 이유로 혼자가 된 둘은 여러 이유로 인연이 닿았고,

친구처럼 3년을 넘게 보다가, 내가 한국으로 돌아올 때쯤 두 분이서 같이 살기 시작했다.


같이 산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다.

아버지는 오랜 가족 병간호를로 복용하게 된 우울증 약을 끊었다. 10년 만이었다.

엄마가 류머티즘 관절염으로 코끼리 다리가 될 때 옆을 지켰던 건 언니와 내가 아니고 그분이다.


결혼식이나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지만,

그들을 보면서 같이 밥을 먹으니 식구이고,

한 집에서 살아가니 가족이라는 생각을 한다.


두 사람의 모습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랑의 모양이 아니래도

그 둘 사이에 애정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랑 썸을 타고 있다고?

그렇다면 다리를 분질러야지.

사진 출처 넷플릭스 크라임씬 제로 캡쳐 / 크라임씬 네버 다이 영원히 만들어주세효


아버지는 나이가 많지만 여전히 대외적인 활동을 많이 한다.

엄마는 그런 자리에는 동행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친한 지인들은 엄마의 존재를 알지만,

드문드문 보는 사람들은 아버지가 여적 혼자인 줄 았았던 모양이다.

그러니 사람을 소개해줬던 게 아닐까.


그렇다고 헐레벌레 나간 아버지지도 아버지지만?

아버지는 봄바람에 괜히 마음 들썩 들썩이는 청춘처럼

문지방을 부지런히 드나들었다.


그래서 그들의 섬 같은 썸은 진지한 관계로 이어졌을까?




아버지의 썸은 우리 부부사이에 자연스레 '바람'이라는 대화 주제로 연결이 됐다.


나: 아버지가 바람이 났대.


남편: 응? 무슨 말이야.


나: 노래 잘 부르는 어떤 사람이랑 여기저기 놀러 다닌 대.


남편: 아버지가? 진짜야~~~~.


나: 아주 매력적인 사람이 나타난다면, 우리는 바람이 날까?


남편: 바람? 아니 계속 붙어 있는데 바람이 날 수 있겠어?


나: 아니.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뭐 '세기의 사랑',

이 사람을 놓치면 세상이 끝날 것 같은 감정이 생길 수도 있잖아.

이제야 만났다 내 사랑. 이런 거.



남편이 생각하는 '바람'은,



관계에서 그동안 쌓아온 게 많으면
그럴 수가 없는 거야.
당신도 있고, 아이도 있고,
우리 셋이 행복했던 시간이 이렇게 쌓여 있는데,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올까?


그는 이어 말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같이 살면서도 감정적으로나 관계를 유지할만한 것들을 쌓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올 수도 있겠지. 좋아하는 음악 취향이나 책이나 취미나 대화나 스킨십이 너무 잘 맞는 사람을 만난다면 더욱이 혹 할 수 있다고 생각해. 내게는 너무 필요한 건데 관계에서 쌓지 못한 어떤 부분들은 진입장벽이 낮아져 있으니까, 허들을 넘기가 쉽지."


내게 다가온 사람이

정말로 내가 기다려왔던 사람이라거나

이상형이라거나

진짜 사랑이라서가 아니라,


"새로운 만남에서, 기존 관계에서 충족하지 못했거나, 그럼에도 채우고 싶은 나의 그림자(욕구)를 보게 되는 거지. 그렇다면 마음이고 뭐고 그리로 쏠리지 않겠어?

자신한테 지금 가장 '필요'한 거니까 그걸 가지고 있는 사람하고 함께하고 싶을 거잖아.

그래야만 할 것 같고."


"하지만 난 그런 게 없는데? 난 지금 이 시간들이 소중해서 그럴 수가 없어."



내가 생각했던 바람은,


내가 목격한 어른의 바람은 그런 거였다.

언제나 부지불식간이었다.

살랑한 바람이 아빠를 건들다 못해 기어이 집까지 쫓아와서는

거센 태풍이 되어 모든 걸 박살 냈다.

물론 아빠는 바람만 문제 된 건 아니었다;;;;


우리 아빠도 그랬고, 우리 할아버지도 그랬고, 옆집 사는 은미네도 그랬다.

옆집 걸러 한 집당 꼭 한 번씩은 '맞춤제작' 바람이 불어 나름으로 휘청거렸다.


그러니 내게 바람은 언제나 가능한 일이었다.

다만, 나이든 상대방이든 바람이 난 경우에 어떻게 할 것이냐에 대해서일찍이 학습했다.


선택은 두 가지.

우리 엄마처럼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거나,

마음에 흘긴 눈을 한 채로 살거나.


나는 연애를 하면서 바람을 겪어본 적은 없다.

물론 전 연인을 못 잊어서 비슷하게 생긴(?) 나를 만난 사람도 있었고,

연인과 정리를 하지 않은 채 날 만나려 드는 사람도 있었지만,

오래가지 않았고, 오래갈 수도 없었다.

난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난 엄마의 딸이었으니까.

물론 여기서는 남겨진 자식의 마음은 생략한다. 그건 또 다른 문제다.


남편이랑 대화하기 전까지도 여전한 마음이었다.

누구든 언제든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나도 남편도.

그런데 그게 사랑이나 어떤 감정이 아닐 수도 있구나.


상대방을 통해 나의 그림자(욕구)를 채우려고 하는 것일 수도 있겠구나.

그렇다면 내가 살다가 어떤 사람이 눈에 들어온다거나 생각이 난다면,

내가 그 시점에 뭘 원하고 있는지, 관계에서 뭘 채우고 싶은 지 잘 들여다볼 필요가 있겠다.



그럼에도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고 싶다면,


반드시 우리는 그전에 끝난다.

'지금 이 관계를 끝낼 수 있어'의 각오 정도는 해야지?



살아봐. 그게 쉽나.


아니, 난 추잡스러운 건 아주 딱 질색이야.


엄마 친구 중에 남편이 바람나서 집을 나갔고, 아주 오랫동안 이혼을 해주지 않았던 이모가 있다.

그리고 남편이 돌아왔다. 그것도 20년 만에.

남편이 돌아오고 나서 몇 년 간은, 매일밤 잠자는 남편 얼굴을 묵사발 내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꼈다지만, 여태 같이 살고 있다.


나:

인생이 그래? 살다 보면 그게 되는 거야?

난 절대 다시 같이 안 살 거 같아. 못 살 것 같아.


엄마:

나도 그 꼴은 못 봐.


나:

어. 그래서 엄마는 이혼했잖아.


엄마:

맞어. 난 추잡스러운 건 아주 딱 질색이야.


우리는 도덕적 자아가 따로 있는 듯, 양심은 밥에도 못 말아먹는 사람들이라.

세기의 사랑이고 뭐고를 떠나 책임감 때문에라도, 의리로라도 그럴 수가 없는 거다.


역시나. 그 어미에 그 딸일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의 썸은 어떻게 됐냐고?



아버지는 이내 그녀의 연락을 피하기 시작했다.

썸도 안 되는 섬으로 끝나버렸다.


음주가무를 즐겨하고,

꼭 반주를 곁들인다는 그녀에게,

흥미나 뭐나 잃은 게 분명하다.


엄마는 모르는 척 쿨하게 말한다.


"왜요. 밖에 나가서 재밌게 좀 놀다 와요."


"어휴, 그런 소리 말어. 나는 하여튼 술 좋아하고 놀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딱 싫으니까."


하긴 아버지가 보기에도

가끔 살랑이는 바람에 눈 껌벅할 수는 있어도,

서로의 마지막을 잘 지켜줄 사이로는

우리 엄마가 제격일 것이다.


그녀는 엉덩이가 가볍지 않고,

의리를 지킬 줄 알며,

은혜 갚는 까치이기 때문에.


그렇다면 엄마는?

아버지에게 이번 일이 그저 해프닝으로 끝날 것을 알았던 걸까. 그만큼 서로간에 신뢰가 쌓였기 때문에? 아무리 딸이래도 두 사람의 속사정까지는 모를 일이다. 허나 웃으며 끝난 것을 보니, 두 분 사이의 애정은 여전하다고 믿고 싶다.



keyword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