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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와요, 예민 보스의 숲으로

나는 왜 남편에게 화가 날까

by 이손끝


밖에서 볼 때는 잘 웃으시고
성격 좋아 보이시던데...
레몬 같이 신 거 많이 드세요.



병원에서 간호사가 피를 뽑기 위해 내 얇디얇은 혈관을 찾는 중이었다.


"제가 혈관이 얇아서요. 괜찮아요. 보통 두세 번은 찔려요."


"네. 혈관이 얇기도 한데요. 혈관 긴장도가 높아서 숨어버리네요.

평소에 긴장을 많이 하셔요? 신 거 많이 드셔보세요~"


나 같으면 열이라도 키웠다는 엄마의 말은 순 거짓부렁인 건지,

나는 혈관까지 조그만 자극에도 긴장해 숨어버리고 마는 걷잡을 수 없이 예민한 인간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HSP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게 아니고



밝은 빛, 강한 냄새, 사이렌 소리 같은 것들에 의해 쉽게 피곤해진다.

툭하면 깜짝 놀란다

실수를 저지르거나 뭔가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요즘 초민감자 (HSP, Highly Sensitive Person) 테스트가 유행인데,

나는 선천적이거나 어린 시절에 해당하는 문답을 제외한 거의 모든 질문에, '그렇다'라고 답한다.


모든 종류의 소리에 신경이 쓰이고, 집안에서의 형광등은 거의 켜지 않고 간접등으로 살아가며,

여행 가서는 베개 때문이거나,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 때문이거나, 암막커튼이 없는 곳이라면 더더욱 잠에 들지 못한다거나, 일정이 갑자기 바뀌거나, 남편이 논리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을 때, 명확한 사실이 아닌 말을 하거나, 급하게 어떤 일을 결정해야만 할 때 예민해지고 민감해지는 이야기를 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하지만, 시각, 촉각, 청각 등의 감각적 민감함을 넘어서

계산을 끝내지도 않았는데 불쑥 계산대로 넘어와 내 옆에 서있는 다음 사람에게서나,

배려인게 분명한데도 강요라고 느껴질 때,

심지어 "답답하시면 먼저 가세요"라는 초보운전 스티커에도,

걷잡을 수 없이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은 단순히 예민한 것이 아닌 내가 해결해야 할 어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욱이 문제는 나는 조그만 일에도 화가 너무 난다는 것이고,

왜 화가 나는지도 모르게 화를 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왜 나는 화가 날까.



삶은 한마디로 비상사태



아빠와 살았던 때의 일이다.

아빠는 어느 순간부터 술을 마시고 새벽에 들어올 때 문을 발로 뻥뻥 차기 시작했다.

집 안의 누군가가 열어주기 전까지 그의 발길질은 멈추지 않았다.

아빠는 한 때 축구선수였던 적도 있기에, 그의 발길질 소리는 한밤중 별안간 내려치는 낙뢰와도 같았다.

하필 아파트 현관 바로 옆이 내 방이었으므로, 나는 매일 그 소리를 들으며 새벽에 소스라치듯 깨어나는 생활을 한동안 반복했다.


한번 심한 두려움을 경험하게 되면 '공포 학습' 효과로 인해 비슷한 자극에도 더 강하게 반응한다.
사람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도 먼저 일상적인 소리를 들려준 직후에 쾅 하는 소리를 들려줘 깜짝 놀라게 했더니 나중에 일상적인 소리를 들려줬을 때도 편도체가 활성화되는 것이 발견되었다.

--- 김주환, 『내면소통』, 인플루엔셜, 2023


나는 조그만 소리에도 정말 기절할 듯이 놀란다.

남편은 그냥 밤늦게 퇴근을 해서 내 앞에 섰을 뿐인데, 그가 온 줄 몰랐던 내가 남편을 후드려 팬 적도 있다....


왜 이렇게 깜짝 놀라냐는 질문에 매번 아빠의 발차기가 생각나는 걸 보면

그때부터 시작된 것이 아닌가 싶다.

나는 어느 때에나 잘 먹고 잘 자고 잘 쌀 수 있는 아주 우월한 유전자를 타고났음에도,

그 시절 무렵부터, '편도체를 활성화'하는 방식으로 살아온 것이 아닐까.


편도체는 위기 상황이 되면 일단 두려움과 공포라는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러한 감정이 생존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두려움과 공포가 속히 해결되지 않으면 흔히 분노나 공격성향으로 표출된다.
내면의 불안감을 외부에 대한 공격으로 해소하고자 하는 이러한 감정을 우리는 '분노'라고 부른다. 그러니 분노는 사실 두려움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말하자면 외부 자극을 '생존 위협'이라 받아들이며 즉시 피하거나 맞서 싸우는 방식으로 말이다.


20대 때는 줄곧 피하는 방법으로 살았다.

습관성 잠수,

다른 사람 인생에서 영원히 사라지는 것을 선택하기,

같은 것.


20대에 오래 상담을 받고 나는 더 이상 피하지 않게 됐다.

하지만 싸움꾼이 됐다.

상담을 잘못했다기보다는 내가 조금 더 생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나는 맞서 싸우기를 선택한 것이다.

혼자 삭히고 피하는 것으로만은 해결되지 않는 것 같으니 화를 내고 표출하는 방식으로.


이처럼 편도체는 두려움과 공포의 감정을 유발하는 중심축이다.
분노나 짜증, 무기력이나 우울감 등의 부정적 감정은 두려움이 지속될 때 나타나는 좌절감의 표현이다.
모든 부정적 감정의 근원이 두려움이다.
편도체가 활성화되면 두려움을 느끼게 되고,
반복적으로 활성화되는 편도체는 자그마한 자극에도 크게 반응하는 공포 회로를 형성한다."


인관관계가 엉망진창인건 어느 쪽이건 같았다.

다만, 내가 겨우 숨을 쉴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라고 지금은 이해하고 있다.




숨은 정답 찾기


다섯 살 아이가 질문을 많이 한다.


"밥풀을 심으면 어떤 나무가 자랄까?"

"나는 이제 엄마 뱃속에서 나왔는데 그럼 엄마와 나는 뭘로 연결되어 있어?"

같은 질문들.


글쎄 어떨까? 넌 어떻게 생각해? 엄마도 궁금하네

아이의 답을 듣고 나면, 내 나름의 생각을 이야기해 준다.

같이 밥풀을 텃밭에 심어 보기도 한다.


아이를 키우면서,

어른은 어쩌면 아이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사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자라는 동안 답을 같이 찾아주는 어른이 없었으므로, 나는 분주했다.

수학문제처럼 정답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내 마음이나 생각이 이리 뛰고 저리도 뛰었다.


예컨대 이런 질문들.


"넌 엄마랑 살래? 아빠랑 살래?"

"아빠는 이제 원룸으로 이사 가야 해. 넌 어떻게 할래?"

와 같이 내가 한 대답으로 내 인생이 완전히 바뀔 것만 같은.


내가 기억력이 특히 좋은 것도,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 처할 때나 조금이라도 (나의) 논리에서 벗어난 말이나 행동이 내게 영향을 미칠 것 같으면 과할 정도로 화가 나는 이유다.


세상이 요구하는 정답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나에게 명확하고 분명하지 않으면,

속속들이 알고 있지 않으면 불안이 올라오기 때문에.


소중한 것들을 잃을까 봐,

무너질까 봐,

내 인생이 또 어떻게 될까 봐.



감정은 마음의 문제가 아니라 몸의 문제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불쾌한 느낌, 즉 부정적인 감정은 일시적으로 발생했다가 곧 사라진다. 우리 몸은 저절로 균형을 잡아가려는 강력한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로 예측오류 상태가 지속되고 그에 대한 수정이 신속하게 이뤄지지 않으면 두려움이나 분노 등의 부정적 정서가 시도 때도 없이 불현듯 올라오거나 만성적으로 통증이 지속되는 상태가 된다. 이것이 감정조절장애의 본질이다. 감정이 불편해지면 반드시 통증도 생기게 마련이다. 둘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다." --- 김주환, 『내면소통』, 인플루엔셜, 2023



나는 <내가 이혼에 실패한 이유>에 대해 쓰고 있다.

이혼으로 직행할 수 있는 고속도로와 같은 수많은 요인 중 하나는 '내가 쉽게 화를 낸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내가 세상을 감각하는 것에 너무 예민하고,

남편의 성기고 섬세하지 않은 부분들이 나를 더 예민하고 민감하게 해서,

또는 그가 내 말대로 하지 않으니까 화가 나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 때문에 부부상담도 받은 적이 있고, 남편과도 끊임없이 이야기를 했다(싸움을 했다).

나 또한 정말 많이 노력했다고 생각하지만,

'화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곧 '화를 참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너무나 힘이 들었다.


그러니 HSP 테스트 결과 같은 것을 내밀며, 나의 예민함을 어필했겠지.

제발 나의 화를 돋우지 말라고, 내 예민함을 건들지 말라고.


하지만 휴재를 두 번이나 하며 겨우 이 글을 쓰는 지금에야 깨달은 것은,


화를 내는 것은 내가 두려움을 느꼈다는 것이고,

살아남기 위해서 내가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방법이었다는 것.

관계 개선을 위해 화를 참을 것이 아니고,

감정은 몸의 문제라고 하니, 몸의 통증을 줄이는 방식으로 해결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김주환 교수는 책과 여러 강의에서 명상과 호흡, 그리고 존 2 운동을 추천한다.

너무 뻔한 결론 같지만 내게는 사고의 전환과도 같았다.


책을 읽기 훨씬 전부터, 명상을 찾아서 하려고 한 것도,

러닝을 시작하게 된 것도 다 내가 살기 위해서, 살고 싶으니까 선택한 것이구나 싶어 스스로가 대견했다.

왜냐면 그전까지는 화를 참지 못하는 내가 노력을 더 해야 하는데 못하는 것 같아 무력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또 뭔가를 하지 않는 방식이 아니라 하는 방식이라 좋았고, 심박의 안정화가 곧 편도체 안정화를 가져올 것이며 그것이 나의 두려움을 해결해 줄 것이라는 결론이 단순하고 명확해 보여서 더 꾸준히 해볼, 살아볼 마음이 들었다.


앞으로는 뛰면서 이혼에 장렬하게 실패할 거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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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외 에피소드 1.


내가 화를 낼 때마다 남편은 내게 "숨 쉬어. 길게 호흡해. 쓰읍 후 쓰읍 후"라고 했었다.

나는 그것 때문에 더 화가 났었는데, 결국은 그의 말이 맞았다.

옆에 아무리 전문가가 있어도 내 눈과 귀를 닫고 있으면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뻔한 게 되나 보다.



번외 에피소드 2.


근 한 달 동안 이 글을 붙잡고 있으면서 힘이 들었다.

그동안 나를 말하는 글쓰기를 하며 솔직했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열쇠를 잃어버려 한동안 들어가지 못헀던 내 마음의 지하실까지 다녀온 기분이다.

글을 쓰면서 나는 내가 불쌍해서, 내가 못돼 쳐 먹은 거 같아서, 내가 짜증 났기 때문에

남편 앞에서 종종 울었다.

그때마다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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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쭈쭈야, 이리 와. 얼른. 안아줄게."

"쭈쭈야, 고생 많았지?"

"쭈쭈야, 다 지나갔다~~ 지나간다~~"


부부의 애칭. 쭈쭈와 대옹이


난데없이 애칭 공격으로 급마무리합니다.


결혼하신 모든 분들 이혼에 실패하고 계실까요?

제가 사는 지역은 비가 많이 오네요.

서로의 애칭 부르며 오늘도 무사한 하루 보내시길 바랄게요.


다음주에는 "아버지가 썸을 타기 시작했다"는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

돌아가신 아버지 말고 다른 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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