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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okphoto Mar 31. 2024

끝말

[만약에 시간을 과거로 돌릴 수 있다면 뭘 하고 싶나요?]


이건 트위터에서 본 질문이다. 상상하는 걸 좋아하는 나지만, 이 질문에 대해서는 떠오르는 일이 도통 없었다. 시간을 돌려서 간들 당시의 나보다 최선을 다해 살 수 있을까, 싶어서다. 그땐 다른 모양의 삶이 있다는 걸 몰라서 이를 악물고 버텨낼 수 있었다. 지금의 나는 달콤한 걸 참 많이도 맛보았기에 지독하게 따분했던 때를 과거의 나만큼 버텨낼 수 없을 게 분명하다. 그러니 어린 나를 대신하여 살아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옆에서 응원의 말을 건네는 것도 별로다. 체급보다 버거운 역기를 들고 숨을 참으면서 자세를 유지하는 사람에게 힘내라는 말은 꺼내지도 않는 편이 낫지 않을까. 과거의 나에게 지금의 나는 보기에만 좋은 개살구 같은 존재일 테니, 똑같은 얼굴로 약만 잔뜩 올릴 바에야 과거로 아예 돌아가지 않는 게 낫겠다.


그럼에도 이놈의 승부욕이 문제다. 세상에 존재도 하지 않는 타임머신 따위의 질문에 답하지 못한 것에 꼭 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든 질문을 이겨보겠다고 답이 될 장면을 하나하나 뒤져보았다. 일단 일어나지 말았어야 해서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순간들이 먼저 떠올랐다. 나에게 먼저 다가와놓고선 이내 멀어지려 했던, 지난 연인과의 마지막 통화도 그중 하나였다. 그 순간이 후회로 남은 건 그만 연락하자는 그의 말에 내가 참지 못하고 뱉은 말 때문이었다.


“날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았더라면, 오늘처럼 슬픈 마음은 안 들었을 거예요.“라고.


그러자 그는 약간은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돌아가도 난 똑같이 말할 거예요. 우리가 만난 시간이 진짜 없는 일이 되길 바라는 거예요?”


난 그 자리 그 시간에 돌아간 것처럼 곰곰이 생각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울먹거리며 대답했다.

“아뇨… 아닌 거 같아요.“


몇 번이고 돌아갈 수만 있다면, 결국엔 내가 더 오래 ‘당신’을 좋아하게 될지언정 그가 내미는 첫 손을 잡겠다고. 날 바라보는 그의 첫 눈빛을 몇 번이고 보고 또 보고 싶어서 끝을 알면서도 돌아가고 또 돌아갈 거라고. 궁색해 보이는 게 싫어서 진짜로 전하고 싶은 말은 모두 삼켜내느라고, 울기만 했다. 더는 날 좋아하지 않는 그는 수화기 너머로 목소리를 아주 오래 들려주었다. 그건 아마 내 울음소리가 잦아들 때까지였을 것이다. 위로는 사랑이 먼저 끝난 사람도 여전히 건넬 수 있는 거였으니까. 그럼에도 위로는 위로라, 그게 위로가 되었다.


가만 생각해 보면 과거로 돌려 고쳐내고 싶은 장면들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건 가장 아끼던 사람과 이별하는 순간, 모진 말을 쏟아내는 나와 그 앞에서 울고 있는 한 사람. 사랑은 줄곧 날 슬프고도 기쁘게 만들었는데, 이별은 사랑보다 훨씬 고약한 점이 있었다. 이별은 사랑이 막을 내리면 매몰차게 사랑의 좋은 점부터 야무지게 거두어갔다. ‘우리’를 이어주던 무엇들이 하나씩 하나씩 사라지면서 텅 빈 속에는 날 선 말들만 남아 그로 인한 통증이 더 또렷해졌다. 사랑 속에 잘도 숨겨두었던 말들이었다. 제 차례가 되면 이별에 의해 자연스레 거두어질 것을 알았지만, 나는 굳이 그 말들을 모두 뽑아내어 앞에 있는 ‘당신’에게 던졌다. 이번이 내가 그를 아프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기 때문이다. 내가 그런 말들을 가지고 있는 줄 짐작도 못했던 그는 끝말에 찔린 채로 털썩 쓰러져 한참을 울었다. 다시 돌아간다면 사랑이 생겨나던 때처럼 스스로 녹아 사라질 수 있도록 기다릴 수 있을까. 끝을 재촉하지 않고 우리가 혼자서 몰래 울 수 있는 시간을 서로 마련해 줄 수 있게 될까. 문득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시간은 돌릴 수 없고, 여기엔 후회들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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