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가장 특별했던 280일 (1)
20주차에 접어들면서 내심 조바심이 났던 게 하나 있다. "나도 어서 느껴봤으면" 하고 마음을 또 한 번 성급해지도록 만들었던 것. 바로 '태동'이다. 대충 이맘때쯤이면 "느낌이 왔다"고들 맘 카페에 환영의 글을 올리던데, 아무리 세밀한 집중력을 기울여보려 해도 '이건가? 아까 그거였나?' 싶을 정도로 가물가물한 느낌 정도가 전부였다.
누군가는 까르르르 물방울이 터지는 느낌 같다고도 했고, 임신주차가 좀 더 된 선배 예비맘들은 '파도가 꿀렁이는 듯'한 느낌이라고도 했다. 그렇단 말이지. 나는 내 배를 스치는 모든 공기방울의 느낌도 어느 하나 놓치지 않으려 고3때 엠씨스퀘어를 사용했을 때나 발휘했을 법한 집중력으로 숨을 죽이곤 했다. "이건 가봐, 이건 가봐, 아기 물방울 소리인가 봐!" 종종 흥분하면 남편은 피식 웃으며 받아쳤다. "이거 그냥 꼬르륵 소리 아냐?"
시각이 아니라
촉각으로 그 몸짓이 다가온다면
과연 어떤 느낌일까
내가 의도하지 않았는데 내 안에서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은 정말이지 고귀하고 신기한 일이다. 9주차 첫 초음파에서 말랑말랑해 보이던 젤리곰 아기가 점점 자라나 팔, 다리를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 모습은 가히 놀라웠다. 때론 긴 다리를 뻥뻥 차는 것 같기도 했고 (긴 다리로 보였다는 건, 예비맘의 바람과 착각이 어우러진 결과일 수 있음 주의.) 때론 운 좋게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워주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어머, 아기가 '엄지척'했어." 내가 내 힘으로 신호를 보내 '움직이라'라고 권유하거나 명령하지 않았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 스스로의 동작을 쉴 새 없이 만들어내고 있던 아기. 시각이 아니라 촉각으로 그 몸짓이 다가온다면 과연 어떤 느낌일까.
미국 산부인과 6번째 방문날. 실은 지난주 5번째 방문 이후, 3주 후에 찾으면 될 예정이었으나 변수가 있었다. 산부인과 측에서 해당 주차에 찍어둬야 하는 초음파 사진이 있는데, 그날따라 아기가 자세를 바꾸지 않아서 결국 촬영하지 못한 사진이 있다고 했다. 아기가 움직여주는 게 마음먹는다고 되는 일도 아니고, 오늘도 또 부동의 자세라면 어떡하나, 걱정이 앞섰다. 대개 '잘 움직이는' 아기를 만나려면 초음파 촬영하러 병원에 가기 전 초콜릿 우유를 마신다는 속설이 있던데, (과학적으로는 증빙된 바인지는 모르겠으나, 다른 예비맘들이 그렇게 한다고들 하니) 아쉬운 대로 달디단 무언가를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배고픈 참에 눈송이를 빼닮은 호빵을 하나 데워먹었다. 지난번, 한인마트에 간 김에 단팥호빵 하나 챙겨 사 오길 참 잘했네.
아기가 움직이는 게 느껴져?
지금 너희 아기 너무 액티브해
부디 지난번과 달리, 포토제닉 하게 사진이 잘 찍혀주길 바라며 초음파실 입장. 이런! 나 왜 초조해한 거니. 이번엔 너무 움직여서 문제란다. 촬영을 하려면 잠깐은 아기가 멈춰줘야 사진이 선명하게 나올 텐데, 뭐가 그리 바쁜지 정말 '엄청나게' 춤을 추고 있었다. 내심 '커서 케이팝스타 시키면 되겠네'라고 흐뭇하게 생각했다. 딱히 태동을 선명하게 느끼지는 못했었던 터라, 열심히 움직이고 있는 자태가 내겐 여전히 낯설기만 한 풍경. 저 움직임이 배 안에서 고스란히 느껴진다면? 꾸르르르의 느낌일까, 꿀렁꿀렁, 혹은 파르르르한 느낌일까.
그다음 날 저녁쯤이었을까. 배 안에서 희미한 파도 한 줄기를 느꼈다. 한밤 중,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차갑게 내리찍는 거친 물결이 아니라, 낮 두세 시 경, 점심 먹고 한창 낮잠이 몰려올 때쯤 발바닥을 살짝 치고 가는 느낌의 '사르르'한 파도의 느낌. 그 물결은 부드럽고 산뜻한 느낌으로 부서졌다. 꿀렁도, 꼬르륵도 아닌, 그 중간 모호한 경계에 서있을 법한 단어. 작은 공이 도르륵 구르는 느낌, 사뿐히 보드라운 파도가 닿는 느낌이 몇 차례 지나가고 나서야 확신했다. 아, 이 느낌이 바로 태동이구나. 남편에게 이걸까, 저걸까, 물음표를 품을 만큼 희미하지 않은 존재, 그렇다고 너무 뚜렷하게 '이것이 태동이오' 하고 나서지 않는 존재. 태동은 그런 것이었다.
결혼 전에 사두었지만, 이제야 감정 이입하면서 '진짜로' 읽고 있는 책. MBC 라디오 장수연 PD의 <처음부터 엄마는 아니었어>에도 '태동'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따금씩 다시 한번 임신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그리운 느낌'이라고 하니, 감이 잡히지 않을 땐 그 느낌이 마냥 궁금하기만 했었다. 그래서 맘껏 느낄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된 지금의 시간은 참 소중하다. 지나가면 쉽게 오지 않을 느낌, 아빠로서는 느낄 수 없는 이 느낌.
임신과 함께 찾아오는 반갑지 않은 증상들 - 입덧, 수면장애, 우울감 - 은 여러 모로 괴롭지만 이따금씩 '다시 한번 임신을 하고 싶다'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그리운 느낌이 있다. 태동이다. 태동. 배속에서 느껴지는 이 이물감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에게 설명하기란 정말 어렵다. 배 속에서 뭔가 꾸물거리는 데 이게 소화가 안될 때 장이 꾸르륵거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내 손으로 내 발바닥을 간지럽히는 것과 남의 손이 내 발바닥을 간지럽히는 건 엄연히 다르지 않은가. 태동은 너무나 명백히 '다른 존재가 나를 건드리는 느낌'이다.
(장수연, 처음부터 엄마는 아니었어, 37-38)
우리 아기는 아빠를 더 좋아할까,
엄마를 더 좋아할까
가끔 남편은 우스갯소리로 농담을 던지곤 한다. 그럴 때마다 요즘 나의 주장은 이것. "당연히 나지. 나는 지금 태동을 느끼고 있다고!" 태어나기 전부터 벌써 나와 미세한 몸짓마저 공유하고 있으니, 나랑 더 친할 거라는 예비맘의 억지 주장. 크지 않은 울림이지만 뱃속의 작은 일렁거림은 그야말로 작지만 확실한 행복, 소확행임을 증명해내고 있었다. 거대하지 않기에 귀 기울이게 되고 잦지 않아서 더 기다리게 되는 소중한 몸짓. 오늘은 몇 번의 움직임이 내 마음을 흔들어댈까. 야리야리한 파동에 손을 맡기고 11월의 차가움을 녹여보는 아침.
당연히 나지.
나는 지금 태동을 느끼고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