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가장 특별했던 280일 (3)
내게 가장 특별했던 280일 (1)
2009년 뜨거웠던 여름날, 유독 공채 가뭄이었던 그때, 서울과 전주, 왕복 6시간을 오가며 그 누구보다 간절히 시험을 치러냈고 산들산들 가을바람 선선하던 그때 비로소 아나운서 이름표를 달았다. 1년 뒤, 다시 치열한 공채를 통해 춘천으로 회사를 한번 옮겼고, 그렇게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2019년 가을날, 나는 보스턴에 있다. 아나운서가 아닌, 대학원생 신분으로, 하루하루를 또 전쟁 치르듯 버티고 견뎌나가고 있다.
일하지 않는 삶, 출근하지 않고 등교하는 삶이란 참 다른 것이었다. 쉽게 말해 어떨 땐 좀 더 여유로운 것 같아서 편히 늘어져있다가도, 어떨 땐 직장인의 삶보다 더 치열해야 할 순간들이 있었다. 어느 조직에 소속돼 꼬박꼬박 월급을 받는 회사원이 아니다 보니 그만큼 자율적인 부분이 확보돼 '자유'가 생긴 부분도 분명히 있었으나, 그 또한 결국엔 책임이 따르는 부분.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자리로 출근해야 하는 강제 의무는 없었으나 누구도 내게 지시하지 않아도 잘하고 싶고 잘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이 모락모락 샘솟아 나는 건 막을 길이 없었으니...
몸이 너무 힘들 땐 자체 휴강의 유혹에 빠져들 때도 있었고 (회사는 안 가면 큰 일 나지만 학교는 안 간다고 큰일이 나진 않으니까?) 뻔뻔하게 숙제 마감일을 잊었던 척해보고 싶기도 했으나 (상사에게 한 소리를 들을 일은 없을 테니까?) 소심해서 그런 호기는 부리지 못했고, 그냥 해야 한다는 기본 사항들을 해내며 버티고 버티고 버텨보았다. 10년 직장생활은 그럭저럭 해낸 것 같은데 오랜만에 학생 모드로 돌아오니 (임신이라는 또 하나의 숙제가 생긴) 1년 차 대학원생은 많은 부분이 어색하기만 했더랬다.
워킹맘은 아니지만 미국 석사 유학 온 ‘스터딩맘’으로서, 눈 비비고 애써 찾아보면 좋은 점도 꽤 있었다. ‘내가 만약 아나운서의 삶을 살면서 지금처럼 예비맘이 되었다면 이러이러한 건 못했겠구나! 일을 안 하니까 가능한 거네?’ 하는 것들. 조곤조곤 추려보니 약 다섯 가지 정도!
해가 중천에 뜨도록 늦잠
점심 먹다가 낮잠
기차에서 꾸벅
앞서 '나무늘보 이야기'에서도 밝힌 바 있지만, 나는 새벽에 일어나서 아침 아기새처럼 하루를 시작하지 않으면 하루 종일 찝찝해서 못 견디고 억울해하던 성향을 가진 자였다. 자기 계발 중독? 일하면서 아침 도서관, 출근 전 스터디를 실천하지 못하면 스스로를 있는 힘껏 구박하며 몰아치듯 혼내고야 마는 특이한 성미가 있었다. 아나운서 시절, 10년 내내 저녁 메인 뉴스를 했었다 보니, 내 정식 근무시간은 12시 - 21시. (물론 낮 라디오 생방송이 12시에 시작돼 11시부터 스탠바이 하곤 했으나) 아침엔 느긋하게 집에서 딩구르르 해도 되는 스케줄이었지만 그걸 못했다. 못해도 6시면 일어나서 후다닥 준비하고 나가 별다방 모닝커피를 드라이브 쓰루해 도서관에 골인하는 걸 즐겼다.
그랬었던 내가 오전 수업이 없는 날엔 (특히 주말엔) 8시, 9시까지 온몸을 침대에 묻고 있는 힘껏 늦잠을 잔다. 잠이 제대로 늘었다. 특유의 강박 때문에 아무리 오후 출근자였다고 해도 하지 못했을 '늦잠' 라이프. 저녁 수업만 있는 날엔 종종 1,2시에 점심을 먹고 소파에 기대 낮잠을 자기도. 집에 머물다 보면 공부든, 독서든, 그 어떤 형태로의 힐링이든, 제대로 생산성 있는 일을 해낼 수 없다는 생각에 일단 눈만 뜨면 주말 평일 상관없이 무조건 집 밖으로 나가 카페행이라도 했던 내가 늦잠과 낮잠을 즐기는 '집순이'가 되다니. 어쨌든 있는 힘껏 잠잘 수 있는 신분이 되었다. 수업 전 미리 가서 예습까진 못할 지라도, 수업시간 맞추는 게 어디야. 남편을 출근시키고 홀로 잠을 더 청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제법 있는 편이다. 대학원생에게는.
학교를 향하는 통근기차 안에서도 뭔가 늘 읽고 외워야 했는데, 또 그 틈새시간에 눈을 감고 자주 잠을 청한다. 늘 풀메이크업 상태에 어딜 가든, 반짝반짝 또릿또릿 하게 깨어있어야 한다는 습관적인 행동들이 어느 순간 쓱싹쓱싹 지워져 버린 셈. 아마도 정해진 시간 같은 공간, 상사와 동료, 후배들의 시선이 없기에 가능한 일이 아닐지. 나인 투 식스 라이프는 아니었으나, 다소 빗겨 난 근무 시간 속에서 늘 가지런한 자세로 바지런히 몸을 놀려야 했기에 낮잠과 늦잠, 쪽잠이라는 단어에 마음 편히 기대진 못했을 것 같다. 쏟아지는 잠에 어쩔 수 없이 눈치껏 분장실에서 잠을 청했을까. (아, 가끔 분장실에 부장님이랑 국장님도 자주 오시는데) 머쓱한 마주침을 애써 피하고 업무 집중하는 척 (?) 하느라 더 괴로웠을지도.
24시간 민낯 라이프
앞서 살짝 언급했지만, 회사에 다닐 땐 늘 풀메이크업 상태였다. 생방송 뉴스 때 뉴스 진행을 위해 전문가에게 진짜 방송용 헤어 메이크업을 받지만, 아나운서 10년 생활이 쌓여오면서 방송 시간이 한참 남았다고 해도 늘 과하지 않은 적당한, 1/2 자체 풀메는 필수였다. 회사에 중요한 손님이 방문하면 수시로 의전해야할 일들도 꽤나 많았고, 방송국 견학 오는 학생들, 부모님들도 많았고, 생방송 라디오 방송도 요즘엔 자주 보이는 라디오로 진행되는 편. 결국엔 회사 속에서는 늘 정갈한 아나운서 메이크업과 단정한 헤어스타일 관리가 당연했던 시절이었다.
아무래도 방송을 내려놓고 나서 가장 크게 달라진 건 메이크업의 정도 아닐까. 특히 입덧이 극심할 땐 세수하고 나서 에센스 바를 힘도 없어서 겨우겨우 미스트를 뿌리고 고통스럽게 선크림을 발랐던 것 같다. 다행이다. 일을 하고 있지 않아서. 학생 라이프를 이어가다 보니 풀장착 메이크업을 할 필요가 없을뿐더러, 적당한 베이스에 과하지 않은 색조감만 더하면 준비는 금방 끝난다. 게다가 헤어스타일에 대해 고민할 필요도 없이, 유학생답게 편한 스타일만 고수하면 되니! 쓱쓱 빗어 묶거나 그마저도 귀찮은 날엔 머리띠 하나면 끝. 헤어 스타일링 기기와 이런저런 헤어 액세서리들을 많이 챙겨 왔는데 거의 쓸 일이 없더라는 슬픈 사실.
그러다 문득 "몇 년 전 사진입니다" 하며 각종 소셜 미디어 계정에 과거 속 내 모습이 사진으로 짠, 뜨기라도 하는 날엔 이런저런 추억에 잠긴다. 내가 이렇게 예쁘장한 모습으로 살기도 했었구나. 학교 수업이 아닌 날엔 하루 종일 민낯을 고수하는 요즘의 모습에 때론 나도 낯설다. 풀 메이크업을 하지 않으면 큰 일어나는 줄 알았는데, 24시간 쌩얼로 집콕하며 과제만 해도 아무 불편함이 없는 대학원생 라이프. 아직 학교 수업까지 민낯으로 갈 배짱은 없다만, 그래도 외출하지 않아도 되는 날엔 최선을 다해 민낯 모드를 고수한다. 물론 너무 창백한가 싶은 날엔 얼른 베이스에 립글로스를 최대한 빨리 바르곤 하지만.
침대와 하나. 눕눕 일상
가장 좋아하는 공간이 침대 위가 되었다. 컨디션이 괜찮다 싶을 땐 학교 도서관, 학교 빈 강의실에도 잘 앉아있는 편인데 아무래도 역시 침대만 한 곳이 없다. 솔직히 예전엔 먼저 임신 출산을 경험한 친구들이 누워서만 하루 온종일을 보냈단 얘기를 들으면 늘 그게 가능한가 싶었다. 내성격상 아무리 힘들어도 눕눕 라이프는 못하겠지 싶었는데, 그 중독에 빠져들고야 말았다. 허리를 세우고 앉아있으면 아무리 좋은 의자라고 해도 긴장이 들어간다. 침대에 큼지막한 베개를 덧대고 기대서 60도 정도의 각으로 몸을 뉘이고 배 위에 담요를 덮고 그 위에 노트북을 비스듬히 올려두고 늘 과제를 한다. 노트북을 누워서 해도 된다는 걸 깨달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심지어 중간고사 공부로 두꺼운 전공서적을 읽어내야 할 땐 정자세로 누워서 90도 각도를 책을 세워 배에 올려두고 읽었다. 정말로 편안히 잘 읽혔다. 아직까지는 그냥 앉는 것보다는 거의 드러누워서 기대앉는 게 가장 좋다. 월화수목금 정해진 곳으로 출근을 해야 하는 직장인 라이프였다면 이렇게 '드러눕는' 몸짓은 맘껏 드러내지 못했겠지. 소심하게 책상에 턱을 괴고 배를 움켜쥐거나 인형을 감싸 쥐고 버티고 있지 않았을까.
사실 공부는 공부방 책상에서, 도서관에 가서, 공부하기 좋은 카페에서 해야 하는 건데 침대가 좋아지다 보니 모든 활동이 침대 위로 귀결되었다. 세상에, 침대 위에서 남편이 사다 준 커피와 샌드위치를 먹는 게 이렇게나 꿀맛이었다니. 몸이 아파서 시들시들 앓고 있을 때 남편이 따끈하게 끓여서 가져다준 만둣국도 힐링밥상이었다. 침대로 가져다줘서 더 편안했던 걸까. 밥은 식탁에서 먹어야 한다는 원칙일랑 사라진 지 오래. 임신하고 난 뒤엔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던 배를 하루에도 두 개씩 먹고 있는데 그 역시 침대 위에서 깎아 먹는 배가 최고.
남편이랑 심야 비디오 게임
한 평생 지금껏 게임을 제대로 해본 적이 거의 없었다. 핸드폰 게임은 더더욱이 한 번도 해본 적도 없고 대학교 때 학보사 근무 시절, 종종 카트라이더를 즐겼던 게 전부?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레트로 게임이 너무 해보고 싶은 거였다. 가끔 휴가철에 콘도 리조트에 놀러 가면 지하 1층 오락실 같은 곳에서 접하곤 했던 그런 게임들. 테트리스나 버블버블, 슈퍼마리오가 하고 싶다면서 남편을 졸랐고, 신형 게임기를 사려고 계획하고 있던 남편은 일단 내 선호를 고려해 레트로 게임기부터 주문했다. 아마존 주문도 쿠팡 로켓 배송 못지않게 참 빠르다. 토요일 오전에 구매했는데 일요일 저녁에 와서 흥분! 그날 늦은 밤 우리 부부는 신나게 게임 몇 판을 즐겼다.
일요일 늦은 밤에 레트로 게임이라... 게임을 좋아하지도 않던 나였지만, 월요일 아침 회의를 앞둔 전날 새벽까지 나란 여자가 게임을 하고 있었을 리 없다. 직장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면 절대 안 했을 일 중 하나. 한 주에 대한 부담감. 다음 한 주 방송에 대한 내재적인 긴장감에 늘 일요일엔 초저녁부터 조용히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데 집중해왔던 나였다. (물론 월요일 아침에 정상 출근을 해야 하는 남편에게는 미안). 이번 학기 월요일 저녁 수업 스케줄을 가진 나에겐 일요일과 월요일 자정을 사이, 심야 타임에도 큰 먼데이 블루스가 찾아오진 않는 편. 덕분에 가능했던 게임 몇 판의 쏠쏠한 재미. (이게 다 학생이라서 가능한 겁니다. 땅땅) 그래서 그런가, 시험기간에는 왜 그리도 더더더 하고 싶던지.
밥을 먹어야 버티는 하루
그리고 마지막. 식사에 대한 집착이 과하게 늘었다는 것. 방송을 할 땐 스스로 엄격하게 체중관리를 하기도 했고 그게 워낙 습관이 돼서 끼니를 자주 걸렀다. 자주 안 먹다 보니 식욕이나 식탐이 적은 편이었고, 딱히 먹고 싶은 음식이 없기도 했다. 라테 한 잔에 베이글 한 입이면 배가 충분히 불렀고, 늘 음료와 디저트, 간단한 요깃거리들이 하루의 주를 이뤘다. 방송시간과 식사시간이 겹치다 보니 밖에 나가서 식사를 하거나 회사 식당에서 밥을 먹는 일도 극히 드물었고, 결국 나는 밥은 물론, '식사다운 식사'를 하는 라이프와 점점 멀어지게 됐었더랬다.
미국에 와서도 크게 달라질 건 없었는데, 임신 일상이 이어지면서부터는 식사에 비로소 민감해지기 시작했다. 우선 잘 안 먹던 '밥'을 먹는 횟수가 많아졌고, 꼭 밥이 아닐지라도 식사다운 식사를 하지 못하면 온몸이 괴롭다. 전에는 방송 핑계로 몸매 관리 핑계로 바쁘다는 핑계로 회식도, 식사자리도, 밥 먹을 기회도 늘 피하는 게 일상이었는데 저절로 신기하게 변했다. 제대로 뭔가를 먹지 못하고 대충 때워야 하는 상황을 견딜 수가 없다 보니, 그날그날 먹고 싶은 메뉴를 고심했다가 혼밥도 잘한다. 혼자 커피와 디저트를 먹는 데에만 365일 익숙했는데, 서너 달 동안 커피 냄새가 너무 싫어서 좋아하던 별다방도 출입하지 못했다. 알아주는 빵순이였는데 빵이 역해서 현미밥을 데워먹곤 했다. 한순간에 변해버린 식습관. 놀랍다. 놀라워!
식사를 규칙적으로 하지 않다가 제대로 끼니를 챙겨 먹다 보니 체중이 갑작스레 증가하지 않을까 다소 걱정은 했는데 (임신 초기에는 많이 찌지 않는 게 좋다고들 하기에) 그런데 의외로 끼니를 챙기다 보니 군것질 횟수가 줄어들게 돼 생각보다 심각하게 걱정할 만한 체중 증가는 없었다. 우리 한식이 좋기는 좋은 것이로구나. 오히려 입덧 때문에 빠진 체중이 상당해서 곧 임신 전의 체중으로 살금살금 돌아오긴 했지만 말이다.
수년 만에 밥이 참 맛있는 거라는 걸 깨달았고, 40주 반짝하고 끝날 수도 있겠으나 먹고 싶은 반찬들도 제법 많아졌다. 회사 다닐 시절 나를 알던 사람들 역시 이런 내 모습을 본 적이 없어 무척이나 어색할 것이라 상상해본다. 늘 커피만 홀짝거리고 과자만 냠냠거리던 나였으므로.
아마도 내가 여전히 아나운서로 살고 있었다면 쉽게 하지 못했을 것들. 정해진 틀 속에서 '자율'적인 면이 최소화돼 있는 조직 안에 내가 있었다면 미처 용기 내서 하지 않았을 일들을 마음껏 하며 살아내고 있다. 늦잠과 낮잠, 쪽잠, 민낯 라이프와 침대에 길들여지 일상에 꼬박꼬박 제때 끼니를 챙겨야 하는 오기까지. 소소하지만 어쩌면 큼지막한 습관들이 나를 돌연 찾아와 함께하고 있는 날들. '학생이니까 그나마 좀 쉴 수 있는 거야', '만약 출근해야 했다면 난 버틸 수 있었을까' 종종 생각해본다. 만약 이런 몸상태로 오늘 생방송 뉴스를 해야 했다면? 아찔한 순간들도 제법 자주 찾아오는 편. 워킹맘도 스터딩 맘도, 그 어느 쪽도 쉽지 않지만, 있는 힘껏 '유학맘'의 위치를 즐겨보고자 작은 매력포인트들에 감정을 밀어 넣고 마음을 쓰다듬어 본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나는 홀로 침대에 눕눕, 민낯에 양념된 고기를 구워 먹고 배를 두드리고 있는 상태. 창문을 살짝 열어보니 햇살이 좋다. 하지만 외출은 단연코 사양할 태세. "침대 밖은 위험해"